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8
Part 8 — 서대문 (1920년 3월 26일, 서대문형무소)
3월 26일.
호송차가 종로에서 서대문으로 향했다.
연재희가 — 차 안에서 경성을 바라보았다.
봄.
경성에 봄이 오고 있었다.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고, 버들가지에 새순이 돋고 있었다. 1년 전 — 만세 소리가 가득했던 종로를 지나,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형무소의 높은 담장이 보였다.
붉은 벽돌.
일본이 지은 감옥. 조선인을 가두기 위해 지은 감옥.
차가 정문을 통과했다.
철문이 뒤에서 닫혔다.
쿵.
그 소리가 — 연재희의 등뼈를 관통했다.
<hr>
입감(入監) 절차.
수인복으로 갈아입었다. 회색 면 수인복. 가슴에 번호가 찍혀 있었다.
제4271호.
머리를 깎았다. 바리깡이 두피를 긁었다.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지품 검사.
만년필.
간수가 만년필을 들어보았다.
"이거 뭐야?"
"만년필이오."
"금지 물품이야. 반입 불가."
"……안 됩니다. 이것만은."
"규정이야."
간수가 만년필을 빼앗으려 했다.
연재희가 — 만년필을 잡고 놓지 않았다.
고문으로 손톱이 빠진 손. 부어오른 손가락. 그 손이 — 만년필을 움켜쥐었다.
"놔!"
간수가 연재희의 손을 때렸다.
연재희가 — 놓지 않았다.
간수가 곤봉을 들었다.
"놓으라고!"
연재희의 손등을 곤봉으로 내려쳤다.
뚝.
뼈가 부러지는 소리.
연재희가 —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 놓지 않았다.
만년필을 — 놓지 않았다.
"이 미친 놈이……"
간수가 다시 곤봉을 들었다.
"기다려."
목소리가 들렸다.
간수가 돌아보았다.
쿠로카와 겐조가 입감 사무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 만년필 — 돌려줘라."
"대위님, 규정상 —"
"내 명령이다."
간수가 — 멈췄다.
쿠로카와가 다가왔다.
연재희의 부러진 손을 보았다.
"만년필을 — 가지게 해줘라."
"하지만 —"
"글을 쓰는 도구다. 위험 물품이 아니야."
간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 쿠로카와의 계급은 거역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만년필이 — 연재희에게 돌아왔다.
부러진 손으로. 피가 묻은 손으로. 연재희가 만년필을 가슴에 안았다.
쿠로카와가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뼈가 부러졌는데 — 놓지 않았군요."
"……이 만년필은 — 진실이오."
"진실이라."
쿠로카와가 돌아섰다.
"10년. 잘 지내시오, 연재희 씨."
연재희가 쿠로카와의 등을 바라보았다.
적이었다.
그러나 — 만년필을 돌려준 적.
이 남자를 미워해야 하는데 —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적에게도 인간이 있었다.
<hr>
독방.
서대문형무소 제3동 7호실.
좁은 방. 1평 남짓. 나무 바닥. 돗자리 하나. 변기 하나. 철문. 작은 환기구.
환기구로 — 하늘이 한 줌 보였다.
연재희가 독방에 들어갔다.
철문이 닫혔다.
쿵.
두 번째 쿵.
첫 번째는 형무소 정문. 두 번째는 독방 문.
연재희가 바닥에 앉았다.
왼손이 부러져 있었다. 통증이 밀려왔다.
오른손으로 — 만년필을 꺼냈다.
만년필이 빛나고 있었다. 금빛.
독방 안을 — 금빛이 비추고 있었다.
좁은 방이 —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연재희가 만년필을 바닥에 놓았다.
빛이 — 바닥을 비추었다. 나무 바닥의 결이 드러났다.
연재희가 — 바닥에 누웠다.
부러진 손을 가슴 위에 놓고.
만년필을 오른손에 쥐고.
천장을 보았다.
콘크리트 천장.
이 천장을 — 10년 동안 보게 될 것이었다.
3,650일.
87,600시간.
연재희가 눈을 감았다.
정순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한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윤보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도 어딘가에 — 이런 방에 갇혀 있을 것이다.
진봉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취리히에서 — 금고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뮐러 이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100년이든 111년이든 — 지키겠다'고 한 남자.
이정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포로 25만 달러를 가져간 여자. 무사히 도착했을까.
만년필의 금빛이 —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어둠이 — 독방을 채웠다.
연재희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진실아."
"……"
"10년이면 — 1930년이오."
"……"
"1930년에 나가면 — 대한이가 열한 살이오."
"……"
"그때까지 — 버텨야 하오."
"……"
"진실은 — 반드시 이긴다."
만년필이 —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대답이라면 대답이고.
연재희가 — 잠들었다.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 밤.
3,649일이 — 남아 있었다.
<hr>
같은 밤. 다른 곳들.
경성 장윤보의 집.
정순이 — 기침을 하며 대한이를 재우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 — 금색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잠든 아이가 열쇠를 놓지 않았다.
정순이 열쇠를 빼내 품에 넣었다.
"재희 씨…… 어디 계세요."
아직 체포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일이면 — 알게 될 것이다.
상하이.
조봉출이 — 프랑스 조계의 은신처에서 전갈을 받았다.
이정숙이 보낸 전갈. '다리를 건넜다.'
25만 달러가 목포를 통해 — 상하이로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봉출이 전갈을 읽고 — 태웠다.
취리히.
진봉기가 UBS 뮐러 이사에게 전했다.
"연재희 선생이 — 체포되었습니다."
뮐러가 — 한참 동안 침묵했다.
"계좌는?"
"안전합니다. 선생님이 —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뮐러가 금고 42번을 열었다.
연재희의 수첩. 정순의 손수건.
두 물건이 — 금고 안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뮐러가 금고를 닫았다.
"111년. 기다리겠습니다."
종로.
한상철이 잡화상의 뒷방에서 — 돈을 세고 있었다.
500엔.
쿠로카와가 약속한 대로 — 체포 보상금.
500엔.
종이돈 뭉치가 — 한상철의 손에서 바스락거렸다.
한상철이 돈을 세다가 — 멈췄다.
"연재희."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자.
차 안에서 수갑을 차고 — 한상철을 바라보던 눈.
그 눈이 — 한상철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상철이 돈을 바닥판 밑에 숨겼다.
그리고 — 잠을 자려 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연재희의 눈이.
잡화상의 어둠 속에서.
한상철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