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7
Part 7 — 쿠로카와의 취조 (1920년 3월 15일~25일, 종로 헌병대)
서대문형무소가 아니었다.
연재희가 먼저 끌려간 곳은 — 종로 헌병대.
쿠로카와 겐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hr>
종로 헌병대. 지하 취조실.
콘크리트 벽. 전등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 나무 탁자.
연재희가 의자에 앉았다.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문이 열렸다.
쿠로카와 겐조가 들어왔다.
연재희가 — 쿠로카와를 처음 보았다.
마흔쯤. 군복. 두꺼운 안경. 가늘고 긴 손가락. 학자 같은 분위기.
"연재희 씨."
조선어.
유창한 조선어.
연재희가 — 놀라지 않았다. 장윤보를 취조한 남자가 조선어에 능통하다는 것을, 전해 들은 바 있었다.
"당신이 — 쿠로카와요?"
쿠로카와가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을 아시는군요."
"장윤보 형에게 들었소."
"장 씨에게서?" 쿠로카와가 의자에 앉았다. "장 씨는 —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형이 아무 말도 안 했다면 — 내가 어떻게 알겠소."
"허." 쿠로카와가 웃었다. "머리가 좋으시군요."
탁자 위에 —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만년필.
연재희의 만년필. 경성역에서 경찰이 압수한.
'眞實' 두 글자.
연재희의 눈이 — 만년필에 멈췄다.
"이 만년필. 재미있는 물건이더군요."
쿠로카와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진실'이라. 독립운동가답게 낭만적인 만년필이군요."
"돌려주시오."
"돌려드리지요. 취조가 끝나면."
쿠로카와가 만년필을 탁자 위에 놓았다.
연재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연재희 씨.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쿠로카와가 연재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스위스 은행 계좌. 번호가 뭡니까?"
연재희가 — 대답하지 않았다.
"UBS 취리히 본점. 당신이 1919년 9월에 계좌를 열었다는 것을 —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연재희가 — 대답하지 않았다.
"계좌번호만 말씀해 주시면 — 석방하겠습니다."
연재희가 — 대답하지 않았다.
쿠로카와가 3초 동안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장윤보 씨도 — 같은 태도였습니다."
"형은…… 계좌번호를 모르오."
"알고 있습니다. 장 씨는 모른다는 것을. 진짜 아는 사람은 — 당신뿐이지요."
쿠로카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연재희 씨. 저는 — 야만인이 아닙니다. 조선의 문화를 존경합니다. 조선인의 용기를 인정합니다."
쿠로카와가 창가로 걸어갔다. 지하 취조실에는 창이 없었지만 — 습관적으로.
"그러나 — 저는 일본 제국의 군인입니다. 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를 — 묵과할 수 없습니다."
쿠로카와가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계좌번호."
연재희가 쿠로카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조선을 존경한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그러면 — 알아야 할 것이 있소."
"뭡니까?"
"조선인은 — 진실을 지키기 위해 죽을 수 있는 민족이오."
연재희의 눈이 — 단단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걸릴 그 사진의 눈. 100년 뒤에도 보는 사람을 꿰뚫는 눈.
"모르오."
쿠로카와가 — 한숨을 쉬었다.
진심인 한숨.
"그렇게 되면 — 방법이 달라집니다, 연재희 씨."
"알고 있소."
쿠로카와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에 — 멈췄다.
"한 가지만 더. 아내 분…… 정순 씨라고 했지요?"
연재희의 몸이 — 굳었다.
"아내 분이 — 폐결핵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서광제라는 의사가 — 매일 당신 집을 방문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종로의 다른 정보원이."
한상철.
한상철이 — 서광제의 방문까지 보고한 것이다.
"정순 씨에게…… 최선의 치료를 받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국대학 병원의 결핵 전문의가 — 경성에 있습니다."
회유.
"계좌번호를 말씀하시면 — 정순 씨를 살릴 수 있습니다."
연재희의 손이 떨렸다.
정순.
1년. 길면 2년.
제국대학 병원. 일본 최고의 의료 시설.
"고문보다…… 잔인한 협박이오."
연재희가 말했다.
"아내를…… 미끼로 쓰다니."
"미끼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진심이라고?" 연재희의 눈에서 — 불꽃이 일었다. "진심으로 — 아내를 팔라는 것이오? 나라를 — 아내 목숨과 바꾸라는 것이오?"
"나라가 아니라 — 계좌번호입니다."
"계좌번호가 — 나라요! 그 돈이 — 조선의 미래요!"
연재희가 소리쳤다.
취조실에 — 연재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쿠로카와가 — 멈췄다.
연재희의 눈에서 — 눈물이 흘렀다.
"정순이를…… 살려주시오. 치료해주시오. 그것은 — 부탁하겠소."
"계좌번호를 말씀하시면."
"계좌번호는 — 못 주오."
"그러면 — 정순 씨도."
"……알고 있소."
연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정순.
미안하오.
미안하오.
나라와 아내 사이에서 — 또다시.
"쿠로카와."
"네."
"당신이 — 아무리 존경한다고 해도. 당신은 — 침략자요. 내 나라를 빼앗은 도적이오. 도적이 '협조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은 — 협박이오."
"……"
"내 대답은 — 모른다. 영원히 — 모른다."
쿠로카와가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5초.
10초.
"……알겠습니다."
쿠로카와가 문을 열었다.
"고문관을 부르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연재희가 혼자 남았다.
탁자 위의 만년필이 — 붉게 빛나고 있었다.
보고 있었다.
연재희의 고통을 — 만년필이 보고 있었다.
<hr>
3월 16일부터 3월 25일.
10일.
고문.
물고문. 손톱 밑에 대나무 쐐기. 매달기 고문(천장에 수갑을 걸고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전기 고문은 아직 이 시대에 보급되지 않았지만 — 물리적 고문만으로도 충분히 잔혹했다.
매일 — 같은 질문.
"계좌번호."
매일 — 같은 대답.
"모르오."
3일째 — 어깨가 빠졌다.
5일째 — 손톱 세 개가 빠졌다.
7일째 —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10일째 — 연재희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그러나 — 입은 열리지 않았다.
CH-0042-1919-1101.
이 번호가 — 연재희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죽어도 말하지 않을 번호. 조선의 미래가 담긴 번호.
쿠로카와가 10일째 되는 날 — 취조실에 들어왔다.
연재희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기대어 있었다. 혼자 앉을 힘이 없었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왼쪽 눈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입술이 터져 있었다.
쿠로카와가 — 물 한 잔을 건넸다.
연재희가 물을 마셨다. 터진 입술에 물이 스며 — 찡했다.
"연재희 씨."
쿠로카와의 목소리가 — 부드러웠다.
"더 이상 — 이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 놓아주시오."
"계좌번호를 말씀하시면."
"모르오."
쿠로카와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게 아니오. 조선인이오."
"조선인이라서 대단한 겁니다."
쿠로카와가 탁자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이 만년필. 취조 기간 내내 — 빛나고 있었습니다."
연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만년필.
"붉은빛이었다가 — 금빛이었다가. 간수들이 무서워하더군요."
"……만년필이 — 무섭다고?"
"빛나는 만년필은 — 보통 물건이 아니지요."
쿠로카와가 만년필을 탁자에 놓았다.
"돌려드리겠습니다."
"뭐?"
"만년필은 — 증거물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도구일 뿐."
쿠로카와가 만년필을 연재희의 앞으로 밀었다.
연재희가 — 수갑 낀 손으로 만년필을 잡았다.
따뜻했다.
10일 동안의 고문. 10일 동안의 고통. 만년필이 — 그 모든 것을 감싸안는 것처럼 따뜻했다.
"쿠로카와."
"네."
"왜 — 돌려주는 것이오?"
쿠로카와가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존경합니다."
"존경?"
"10일 동안 —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저는 — 이런 사람을 처음 봅니다."
"……"
"당신은 — 적이지만. 존경합니다."
쿠로카와가 서류를 꺼냈다.
"연재희. 죄명: 불법 해외 도항, 독립운동 자금 모금, 제국 안보 위협. 형량: 징역 10년."
10년.
"서대문형무소에 이송됩니다."
연재희가 —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서른여덟이 되어야 나올 수 있었다.
대한이가 — 열한 살.
정순이 — 살아있을까.
"쿠로카와."
"네."
"하나만 — 부탁하겠소."
"뭡니까?"
"정순이를…… 치료해주시오. 계좌번호가 아니라 — 인간으로서 부탁하오."
쿠로카와가 침묵했다.
5초.
"……일본 제국은 — 인질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정순 씨에 대한 치료는 — 제가 관여할 사안이 아닙니다."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오?"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소."
연재희가 눈을 감았다.
정순.
미안하오.
미안하오.
쿠로카와가 일어섰다.
"연재희 씨."
"……"
"111년이라고 했지요. 당신이 UBS에서."
연재희가 눈을 떴다.
"어떻게……"
"베른 공사관의 보고입니다. 뮐러라는 은행가가 — 동료에게 말했다고. '조선인 고객이 111년을 계획한다'고."
"……"
"111년. 1919년부터 2030년."
쿠로카와가 문을 열었다.
"그 111년 중 — 첫 10년을 여기서 보내게 되는군요."
문이 닫혔다.
연재희가 혼자 남았다.
만년필을 쥔 손이 — 떨렸다.
고문으로 손톱이 빠진 손. 부어오른 손가락.
그 손으로 — 만년필의 '眞實'을 만졌다.
따뜻했다.
10년.
10년을 — 이 만년필과 함께 버텨야 했다.
"진실아."
연재희가 만년필에 말했다.
"이길 수 있겠지?"
만년필이 — 금빛으로 빛났다.
대답이라면 대답이고, 위로라면 위로였다.
연재희가 — 울었다.
소리 없이.
취조실의 콘크리트 벽에 — 눈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