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5

Part 5 — 장윤보의 침묵 (1920년 3월 3일~10일, 인천/경성)

3월 3일. 새벽. 인천 헌병대 분소.

장윤보가 —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갑. 양 손목에 철 수갑.

허리가 아팠다. 경찰에게 제압당할 때 발로 차였다.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러나 — 장윤보의 얼굴은 평온했다.

'재희가 빠져나갔다.'

그것이면 — 됐다.

25만 달러를 잃었다. 아깝다. 10가문의 피 같은 돈. 그러나 — 나머지 25만 달러는 연재희가 가지고 빠져나갔다. 그리고 계좌번호는 안전했다. 장윤보 자신은 계좌번호를 몰랐으니까.

문이 열렸다.

쿠로카와 겐조가 들어왔다.

장윤보가 — 쿠로카와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 이 남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경성 헌병대 정보과. 연재희를 추적하던 남자.

"장윤보 씨."

쿠로카와가 조선어로 말했다.

유창한 조선어에 — 장윤보가 눈썹을 올렸다.

"조선말이 유창하시구려."

"10년 배웠습니다."

쿠로카와가 장윤보 앞에 앉았다.

"장 씨. 상황을 아시겠지요?"

"안다."

"현장에서 25만 달러가 나왔습니다. 미국 달러 고액권. 잡화상의 물건이 아니지요."

"내 돈이오."

"당신의 돈?"

"무역으로 번 돈이오."

쿠로카와가 미소를 지었다.

"무역상의 창고에서, 새벽 세 시에, 달러 뭉치를 보자기에 싸서. 이것이 — 합법적인 무역인가요?"

"세관에 신고하려 했소."

"새벽 세 시에?"

"아침에 하려고 미리 가져온 것이오."

쿠로카와가 웃었다.

"장 씨. 거짓말을 하셔도 — 조금 더 그럴듯하게 하시지요."

"솔직히 말하겠소." 장윤보가 쿠로카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돈이오. 내가 어디에 쓰든 — 당신과 상관없소."

"상관이 있습니다. 이 돈이 — 독립운동 자금이라면."

"독립운동 자금이라는 증거가 있소?"

쿠로카와가 — 사진을 꺼냈다.

연재희의 사진.

"이 남자를 아시지요?"

장윤보의 표정이 — 변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오."

"정말요? 이 남자가 — 당신의 창고에서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혼자였소."

"증인이 있습니다."

한상철.

한상철이 — 증언한 것이다.

"종로의 한 상인이 — 인천항에서 당신과 이 남자를 함께 목격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장윤보가 — 이를 악물었다.

한상철.

그 쥐.

"모르는 사람이오."

장윤보가 반복했다.

쿠로카와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장 씨. 지금은 — 대화입니다. 그러나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 방법이 달라집니다."

고문.

쿠로카와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 장윤보는 알아들었다.

"내 이름은 장윤보. 종로 무역상이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오."

쿠로카와가 장윤보를 바라보았다.

존경.

이 남자도 — 존경할 만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쿠로카와는 알고 있었다.

"경성으로 이송하겠습니다. 종로 헌병대에서 — 다시 이야기합시다."

쿠로카와가 방을 나갔다.

장윤보가 혼자 남았다.

수갑이 차가웠다.

갈비뼈가 아팠다.

그러나 — 장윤보는 웃었다.

재희가 빠져나갔다.

25만 달러가 살았다.

그것이면 — 됐다.
<hr>
3월 5일. 경성 종로 헌병대.

장윤보가 경성으로 이송되었다.

종로 헌병대 지하 취조실.

쿠로카와가 직접 취조했다.

3일 동안.

첫째 날 — 대화.

"연재희를 아는가?"
"모른다."
"10가문이란 무엇인가?"
"모른다."
"스위스에 돈을 보냈는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둘째 날 — 압박.

"당신의 무역상을 폐쇄할 수 있다."
"폐쇄하시오."
"가족이 있지 않은가."
"가족은 건드리지 마시오."
"협조하면 — 풀어주겠다."
"풀어달라고 한 적 없소."

셋째 날 — 고문.

물고문.

얼굴 위에 천을 덮고 — 물을 부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1분.

2분.

의식이 흐려졌다.

물이 멈췄다.

"연재희가 어디 있는가?"

"……모른다."

다시 물.

1분.

멈춤.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는?"

"……모른다. 진짜 모른다."

이것은 — 진실이었다.

장윤보는 정말 계좌번호를 몰랐다. 연재희가 의도적으로 — 장윤보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형이 잡히더라도 —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으니까.'

쿠로카와가 장윤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 계좌번호를 모른다.

"……연재희만 아는 것인가."

장윤보가 피를 뱉으며 웃었다.

"내가 알 만한 사람으로 보이오?"

쿠로카와가 — 취조를 중단했다.

장윤보에게서는 — 더 이상 빼낼 것이 없었다.

이 남자는 돈의 운반만 맡았다. 금고의 열쇠는 — 연재희가 가지고 있었다.

"연재희를 잡아야 한다."

쿠로카와가 취조실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연재희를 잡으면 — 모든 것이 풀린다."
<hr>
3월 8일. 경성 어딘가.

연재희는 — 숨어 있었다.

인천에서 어선으로 영종도로 건너간 뒤, 다시 소형 선박으로 서해안을 따라 아산만으로. 아산에서 기차로 — 경성 외곽.

경성 시내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수배 중이었다.

연재희가 숨은 곳은 — 최동진의 서당.

경성 외곽 성북동. 최 가문의 서당. 마흔넷의 유학자 최동진이 — 연재희를 숨겨주었다.

"재희 씨, 여기 있으면 안전하오. 헌병대가 종로를 뒤지고 있지만 — 성북동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오."

"동진 형, 고맙소."

"고마운 건……"

"나라가 독립하면. 알고 있소."

두 사람이 쓴 웃음을 지었다.

연재희가 최동진에게 물었다.

"윤보 형은 — 어떻게 되었소?"

최동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종로 헌병대에 있소. 3일째 취조를 받고 있다고 들었소."

"고문?"

"……아마."

연재희가 주먹을 쥐었다.

장윤보.

연재희 대신 잡힌 형.

"25만 달러는?"

"박재길 형이 — 다른 배를 구했다고 하오. 상하이행. 언제 출항하는지는 — 아직."

"봉출 형에게 연락이 닿소?"

"이정숙이라는 여자가 — 경성에 왔다고 하오."

"이정숙이? 상하이에서?"

"김태수가 잡힌 뒤로 — 상하이가 위험해져서. 연락책을 바꾸러 직접 왔다고."

연재희가 생각했다.

이정숙이 경성에 왔다.

상하이의 연결이 아직 살아 있다.

25만 달러를 — 아직 보낼 수 있다.

"이정숙을 만나야 하오."

"만날 수 있소. 내일 밤."
<hr>
3월 9일 밤. 성북동 최동진의 서당.

이정숙이 왔다.

치파오가 아닌 — 조선 한복을 입고 있었다. 상하이의 중국 여성이 아니라 — 경성의 조선 여성으로 위장.

"연재희 선생님."

"이정숙 씨."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상하이 상황은?"

"김태수가…… 말했습니다."

연재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뭘?"

"봉출 씨의 이름. 금은방 위치. 인천 루트."

"봉출 형은?"

"피신했습니다. 프랑스 조계를 떠나 — 중국인 구역으로. 왕시푸 어르신이 숨겨주고 있습니다."

"금은방은?"

"폐쇄했습니다. 왕 어르신이 — 가게를 닫고 가족과 함께 피신했습니다."

루트가 — 무너지고 있었다.

경성에서 장윤보가 잡혔다.

상하이에서 김태수가 자백했다.

인천항이 감시당하고 있다.

"이정숙 씨, 아직…… 돈을 보낼 방법이 있소?"

이정숙이 생각했다.

"하나 있습니다."

"뭐요?"

"인천항이 아니라 — 목포항."

"목포?"

"목포에서 상하이로 가는 중국 어선이 있습니다. 정기 루트가 아니라 — 밀수선. 이 배는 일본 세관의 감시가 약합니다."

"밀수선으로 돈을?"

"돈이 아니라 — 금으로. 인천의 25만 달러를 목포로 가져와 — 금으로 바꾸고 — 밀수선에 싣는 겁니다."

"목포에 금은방이?"

"있습니다. 조봉출 씨가 — 미리 목포 루트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연재희가 이정숙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

서른. 임시정부 비밀 연락원. 상하이 10년 경력. 아편굴 통로를 아는 여자. 밀정을 따돌리는 여자.

"이정숙 씨, 당신이 없었으면……"

"칭찬은 나라가 독립하면 해주세요."

이정숙이 웃었다.

같은 말. 모두가 하는 같은 말.

'나라가 독립하면.'

"목포까지 — 누가 돈을 가져갑니까?"

"제가."

"혼자요?"

"저 혼자가 가장 안전합니다. 조선 한복을 입고 기차를 타면 —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보따리를 들고 기차를 타는 건 — 조선 어디서나 흔한 풍경이니까."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오."

"박재길 씨에게 연락하겠습니다. 25만 달러를 — 제가 인수하여 목포로."

이정숙이 일어섰다.

"연재희 선생님."

"네."

"조심하십시오. 선생님을 — 경성 전체가 찾고 있습니다."

"알고 있소."

"장윤보 선생님이…… 선생님 대신 잡혔습니다. 장 선생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 부디 무사하십시오."

이정숙이 방을 나갔다.

연재희가 홀로 남았다.

서당의 밤.

성북동의 고요한 밤.

연재희가 수첩을 펼쳤다.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삼월 구일. 경성 성북동.

윤보 형이 잡혔다. 내 대신.
25만 달러 중 반을 잃었다.
나머지 반을 — 이정숙이 목포로 가져갈 것이다.

윤보 형.
형이 경찰에게 던진 달러가 — 바람에 흩날렸소.
그 달러를 — 형의 피로 산 달러를 — 반드시 스위스에 넣겠소.

정순의 기침이 점점 심해지고 있소.
대한이가 걷기 시작했소.
만년필을 좋아하오.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
이겨야 한다.

형이 고문당하고 있는 지금,
이 만년필은 —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소.

진실아.
이겨다오.

만년필의 '眞實' 두 글자가 —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경고의 빛.

분노의 빛.

서당 밖에서 — 바람이 불었다.

경성의 3월.

1년 전 — 만세 소리가 울려퍼진 3월.

올해의 3월은 —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