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4
Part 4 — 인천항의 밤 (1920년 3월 2일~5일, 경성/인천)
3월 2일. 저녁. 경성.
연재희와 장윤보가 짐을 꾸렸다.
짐이라고 해봐야 — 보자기 두 개. 안에는 옷가지와, 옷 사이에 숨긴 돈뭉치.
$500,000.
현금. 미국 달러 고액권.
10가문이 재산을 팔아 모은 돈. 조만석의 시장, 이상덕의 논, 한예린의 한옥, 송학주의 인쇄기 — 이 모든 것이 달러 지폐 뭉치가 되어 보자기에 들어 있었다.
"이 보자기가 — 조선의 미래요."
장윤보가 말했다.
"무겁소."
"무거워야 하오."
정순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대한이를 안고.
"재희 씨."
"정순아."
"또 — 가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멀리 가는 게 아니오. 인천만 다녀오겠소."
"인천도…… 멀어요."
정순이 웃었다. 슬픈 웃음.
연재희가 아내 앞에 섰다.
"정순아. 이번이 마지막이오."
"마지막?"
"이 돈을 보내고 나면 — 내 일은 끝이오. 나머지는 장 형과 봉기가 할 것이오."
"그러면…… 돌아오시는 거예요?"
"돌아오겠소."
"약속해요."
연재희가 정순의 손을 잡았다.
"약속하오."
정순이 — 기침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기침에서 — 손수건에 빨간 것이 묻었다.
피.
정순이 손수건을 빠르게 접었다. 연재희가 보지 못하게.
그러나 — 연재희는 보았다.
빨간 점.
정순의 손수건에 묻은 빨간 점.
폐결핵.
"……정순아."
"괜찮아요. 기침이 좀 심해서. 가세요. 빨리 다녀오세요."
연재희가 — 아내를 안았다. 대한이가 둘 사이에서 까르르 웃었다.
"빨리 다녀오겠소."
연재희가 문을 나섰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 갈 수 없으니까.
<hr>
3월 2일. 밤 열 시. 경성역.
연재희와 장윤보가 인천행 마지막 기차를 탔다.
보자기 두 개를 무릎 위에 놓고 — 앉았다.
기차가 움직였다.
경성의 불빛이 뒤로 물러갔다.
"형, 인천에 도착하면 — 어떻게 하오?"
"박재길의 창고에 짐을 맡기겠소. 내일 아침 출항하는 상하이행 화물선에 실을 것이오."
"어떤 배?"
"신영호(新榮號). 중국 국적 화물선. 면직물을 싣고 가오."
"선장은?"
"믿을 만한 사람이오. 장사 거래 10년 된 사이."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가 인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30분.
창밖으로 — 논밭이 보였다. 달빛 아래 얼어붙은 논. 겨울의 마지막.
"형."
"응."
"김태수가…… 버텨줄까."
장윤보가 침묵했다.
"모르겠소. 일본 경찰의 고문은 —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태수가 봉출 형 이름을 말하면 —"
"봉출이 형은 대비하고 있을 것이오. 이정숙이 옆에 있으니까."
"그래도……"
"재희." 장윤보가 연재희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이 돈을 배에 싣는 것. 그것이 — 지금 할 일이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가 인천역에 도착했다.
밤 열한 시.
<hr>
인천항.
박재길의 창고.
부두에서 200미터 떨어진 목조 건물. 안에는 수출입 화물이 쌓여 있었다 — 면직물, 도자기, 건어물.
박재길이 문을 열었다.
"장 사장, 어서 오시오."
오십대 남자. 검게 탄 얼굴. 해풍에 깎인 주름.
"재길 형, 이것을."
장윤보가 보자기를 건넸다.
박재길이 보자기를 받아 무게를 가늠했다.
"무겁소."
"돈이오."
"얼마나?"
"50만 달러."
박재길의 눈이 커졌다.
"50만……"
"내일 신영호에 실어주시오. 면직물 상자 밑에."
"알겠소."
박재길이 보자기를 창고 안쪽으로 가져갔다. 면직물 상자들 사이에 숨겼다.
연재희가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이 창고를 — 한상철이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Ch.3에서 한상철이 인천항 박재길의 사무소를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오사카마루 선장에게 봉투를 건네는 것을 목격했으니까.
"형, 이 창고…… 안전하오?"
"내 창고요. 20년 됐소. 부두 인부들은 다 내 사람이오."
"외부인이 접근한 적은?"
박재길이 생각했다.
"한 달 전에…… 젊은 남자가 한 번 왔소. 잡화를 팔겠다고."
"잡화?"
연재희의 눈이 좁아졌다.
"종로에서 왔다고 했소. 한씨상회라고……"
한씨상회.
한상철.
연재희와 장윤보의 눈이 마주쳤다.
"그놈이 — 여기까지 왔소."
장윤보의 얼굴이 굳어졌다.
"재길 형, 그 남자에게 뭔가 보여준 것은 없소?"
"아무것도. 잡화 가격만 얘기하고 보냈소."
"그런데 — 그 남자가 여기 왔다는 것 자체가 문제요."
연재희가 창고 밖을 내다보았다.
인천항의 밤. 부두에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등대의 불빛이 돌아가고 있었다.
"형, 시간이 없소. 내일 아침까지 — 이 돈을 배에 실어야 하오."
"내일 아침 여섯 시 출항이오." 박재길이 말했다. "새벽 네 시에 화물 선적을 시작하겠소."
"좋소."
연재희와 장윤보가 창고에서 밤을 새기로 했다.
보자기 옆에서.
50만 달러 옆에서.
<hr>
3월 3일. 새벽 세 시.
연재희가 잠에서 깼다.
창고 밖에서 —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
연재희가 장윤보를 흔들어 깨웠다.
"형, 일어나시오."
장윤보가 눈을 떴다.
"무슨 소리?"
두 사람이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 가까워지고 있었다. 군화 소리.
경찰.
"형, 나가야 하오."
"돈은?"
"돈부터 옮겨야 하오."
연재희가 보자기를 집었다. 장윤보가 다른 보자기를 집었다.
창고 뒷문.
박재길이 뒷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부두 뒤편 골목이 있소."
세 사람이 뒷문으로 나섰다.
그 순간 — 앞에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였다.
"거기 서라!"
일본어.
일본 경찰.
세 명. 군복 차림. 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 뒤에서도.
"움직이지 마라!"
뒤에서 두 명이 더.
앞뒤로 — 다섯 명.
연재희의 심장이 멈췄다.
포위.
함정이었다.
한상철이 — 인천항의 움직임을 보고했고.
쿠로카와가 — 이 밤을 노렸다.
<hr>
"보자기를 내려놓아라."
일본 경찰이 다가왔다.
장윤보가 — 연재희 앞에 섰다.
"재희, 뒤로."
"형?"
"재길이 형, 부두 쪽 길을 아시오?"
박재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재희를 데리고 가시오. 나는 — 여기서 막겠소."
"형, 안 됩니다!"
"재희." 장윤보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네가 잡히면 — 계좌번호가 넘어간다. 나는 계좌번호를 모르오. 내가 잡혀도 — 계좌는 안전하오."
"그래도 —"
"가라!"
장윤보가 소리쳤다.
그리고 — 자신의 보자기를 경찰 쪽으로 던졌다.
달러 지폐가 — 공중에 흩날렸다.
바람에 날리는 달러.
경찰들이 — 순간 당황했다.
"뭐야, 이게!"
그 1초.
박재길이 연재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쪽이오!"
부두 뒤편 골목. 좁은 길. 어둠 속으로.
연재희가 달렸다. 한 손에 보자기(25만 달러)를 들고.
뒤에서 — 장윤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장윤보요! 종로 무역상 장윤보!"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 큰 소리로.
경찰의 관심을 자신에게 끌기 위해.
연재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 장윤보가 경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장윤보의 보자기 — 25만 달러가 —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형!!!"
연재희가 소리쳤다.
그러나 — 박재길이 연재희를 끌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달렸다.
숨이 차도록 달렸다.
부두 뒤편. 어선들이 정박한 작은 포구.
"여기요."
박재길이 어선 한 척을 가리켰다.
"이 배로 — 영종도까지 갈 수 있소. 영종도에서 다른 배를 잡아 —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형을 — 두고 갈 수 없소."
"장 사장이 직접 시간을 벌어준 것이오. 가시오."
연재희가 — 멈췄다.
보자기를 쥔 손이 떨렸다.
25만 달러.
50만 달러 중 절반만 살렸다.
나머지 25만 달러는 — 장윤보와 함께 경찰에게.
그리고 장윤보가 — 체포되었다.
"재길 형, 이 보자기를…… 배에 실어주시오. 상하이로."
"알겠소. 신영호가 아니라 — 다른 배를 찾겠소. 경찰이 신영호를 감시할 테니까."
"고맙소."
연재희가 보자기를 박재길에게 건넸다.
그리고 — 어선에 올랐다.
어선이 포구를 떠났다.
인천항의 불빛이 멀어졌다.
뒤에서 — 경찰의 호각 소리가 들렸다.
연재희가 인천항을 바라보았다.
장윤보.
10가문의 중심. 40년 장사꾼. 연재희의 가장 가까운 형.
그 형이 — 연재희 대신 잡혔다.
연재희의 눈에서 — 눈물이 흘렀다.
"형……"
어선이 바다로 나갔다.
서해의 밤바다.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