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3
Part 3 — 대한이의 첫 걸음 (1920년 2월 25일~3월 1일, 경성)
2월 25일. 장윤보의 집. 아침.
연재희가 눈을 떴다.
옆에 정순이 자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새벽에 또 기침을 했다. 등을 두드려주면 잠들고, 잠들면 또 기침하고.
서광제가 어제 말했다.
"재희 씨, 솔직히 말하겠소."
서광제의 병원. 은밀히 찾아간 진찰.
"정순 씨의 폐가 — 왼쪽이 거의 망가졌소."
"……"
"오른쪽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 이 속도면……"
"얼마나 남았소?"
서광제가 침묵했다.
"광제 씨. 말해주시오."
"……1년. 길면 2년."
1년.
정순이 — 1년.
"약은?"
"이 시대에는 — 결핵에 효과적인 약이 없소. 영양을 충분히 공급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안정을 취하는 것이 최선이오."
"스위스에 보내면 — 좋은 병원이 있지 않겠소?"
서광제가 고개를 저었다.
"유럽이라고 다르지 않소. 결핵은 — 전 세계적으로 불치에 가까운 병이오. 스트렙토마이신이라는 약이 연구 중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 아직 실용화되지 않았소."
스트렙토마이신. 결핵 특효약. 실용화는 — 1944년.
24년 뒤.
정순은 — 기다릴 수 없었다.
연재희가 아침에 눈을 뜨고 — 잠든 아내를 바라보았다.
1년.
1년 안에 —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자금 이동. 스위스 예치. 그리고 — 아내 곁에 있는 것.
그러나 — 둘 다 할 수 있을까.
나라와 아내.
다시 — 그 선택 앞에 서 있었다.
<hr>
방문이 열렸다.
작은 발소리.
대한이가 — 걸어오고 있었다.
비틀비틀. 양쪽 팔을 벌리고. 한 발. 두 발. 세 발.
넘어질 것 같으면서 — 넘어지지 않았다.
네 발. 다섯 발.
연재희의 무릎 앞까지 — 걸어왔다.
그리고 — 넘어졌다.
연재희의 무릎에 안기듯 넘어졌다.
"아!"
대한이가 소리를 냈다. 울음이 아니었다. 웃음.
넘어졌는데 — 웃고 있었다.
연재희가 아들을 안아 올렸다.
대한이가 — 또 만년필을 잡았다.
"이 녀석이…… 만년필을 좋아하는구나."
연재희가 웃었다. 오랜만의 진짜 웃음.
대한이의 손가락이 '眞實' 두 글자를 만지작거렸다.
만년필이 — 따뜻하게 빛났다. 금빛이 아닌 — 노란 빛. 아침 햇살 같은 노란 빛.
"정순아, 봐."
연재희가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정순이 눈을 떴다.
"대한이가 — 걸어왔소. 여기까지."
정순이 — 웃었다. 기침 없이.
"대한아."
정순이 아이의 볼을 만졌다.
"걸었구나."
세 식구가 — 온돌 위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
만년필의 노란 빛이 세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이 순간이 — 영원하면 좋겠다.
그러나 — 영원한 것은 없었다.
<hr>
3월 1일. 대한이의 첫 번째 생일. 3.1운동 1주년.
장윤보의 집 안방.
떡을 놓고 — 작은 돌잔치를 했다.
10가문이 모두 모일 수는 없었다. 감시가 심했으니까. 장윤보, 백경수, 조만석, 서광제 — 네 사람만 왔다.
떡. 실. 연필. 돈. 붓.
돌잡이 상에 다섯 가지를 놓았다.
그리고 — 연재희가 하나 더 놓았다.
만년필.
"만년필까지 놓는 거요?"
조만석이 물었다.
"이것도 — 잡을 수 있는 물건이니까."
대한이가 상 앞에 앉았다. 열두 달. 만 1세.
아이의 눈이 다섯 가지 물건을 훑었다.
떡. — 흥미 없음.
실. — 흥미 없음.
연필. — 잠깐 봤다가 넘김.
돈. — 만져보다가 놓음.
붓. — 흥미 없음.
그리고 — 만년필.
대한이의 손이 — 만년필을 잡았다.
꽉.
놓지 않았다.
만년필이 — 금빛으로 빛났다.
방 안에 있던 다섯 명의 어른이 — 모두 보았다.
"빛난다."
백경수가 말했다.
"만년필이…… 빛나고 있소."
장윤보가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 이 만년필이…… 보통 만년필이 아니었구나."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3.1날 받았소. 만세를 외치다가 — 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진 것을 주웠소."
"누구의?"
"모르오. 군중 속에서 — 그냥 내 손에 왔소."
만년필이 대한이의 작은 손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대한이가 — 웃었다.
만년필을 잡고 — 방 안을 걸어다녔다. 비틀비틀. 그러나 — 넘어지지 않았다.
만년필이 — 아이를 잡아주는 것 같았다.
정순이 눈물을 흘렸다.
"이 아이는…… 진실을 잡았네요."
'眞實'을 잡았다.
돌잡이에서 — 진실을 잡은 아이.
연재희가 아들을 안아 올렸다.
만년필을 뺏으려 하자 — 대한이가 울었다.
"알았다, 알았다. 잡고 있어."
연재희가 웃으며 아들을 안았다.
만년필을 쥔 채.
3.1운동 1주년.
1년 전 이 아이가 태어났다. 만세 소리 속에서.
1년 뒤 이 아이가 만년필을 잡았다. 돌잡이에서.
이것이 — 운명이라면.
이 아이가 — 만년필을 이어받을 것이었다.
111년의 두 번째 주자.
<hr>
돌잔치가 끝나고.
장윤보가 연재희를 불렀다.
"재희."
"형."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소."
"좋은 소식부터."
"취리히에서 전갈이 왔소. 봉기 편에."
"봉기가?"
"1차 금괴가 마르세유에 도착했소. UBS 대리인이 인수했다고. $30,000, 안전하게 취리히까지."
$30,000.
첫 번째 금괴가 — 스위스에 도착했다.
연재희의 가슴이 — 뛰었다.
"됐소!"
"됐소. 첫 번째 다리를 건넜소."
"나쁜 소식은?"
장윤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하이에서 문제가 생겼소."
"조봉출이?"
"봉출이 형은 괜찮소. 그런데 — 김태수가 잡혔소."
김태수.
조봉출의 부하. 경성에 왔다가 한상철에게 미행당한 그 남자.
"잡혔다고?"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서. 3일 전. 프랑스 조계 밖에서 — 일본 경찰에게."
연재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김태수가…… 무엇을 알고 있소?"
"봉출이 형의 이름. 금은방 위치. 그리고 — 인천항 루트."
"계좌 정보는?"
"모를 것이오. 봉출이 형도 계좌번호는 모르니까. 그건 재희와 봉기만 아는 거잖소."
연재희가 숨을 내쉬었다.
계좌번호는 — 안전했다.
그러나 — 김태수의 체포는 위험했다.
김태수 → 조봉출 → 장윤보 → 연재희.
사슬이 이어질 수 있었다. 김태수가 고문을 받으면 — 조봉출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조봉출이 잡히면 — 장윤보까지.
"형, 서둘러야 하오."
"알고 있소."
"경성에 있는 50만 달러를 — 지금 당장 인천으로 옮겨야 하오."
"이미 준비하고 있소. 내일 밤 — 인천항으로."
"내가 직접 가겠소."
"안 돼. 네가 나서면 — 더 위험해."
"형."
연재희가 장윤보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돈을 지키는 것이 — 내 일이오. 내가 시작한 일이오."
장윤보가 한참 동안 연재희를 보았다.
그리고 —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같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