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1

Part 1 — 귀환 (1920년 1월~2월, 태평양/경성)

1920년 1월 15일. 태평양.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화물선 오리건호가 태평양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연재희가 갑판에 서 있었다.

두 번째 태평양.

처음 건널 때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 희망을 안고. 이번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 두려움을 안고.

반년 만이었다.

1919년 4월에 경성을 떠났다.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닿았다. 미주를 순회하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갔다. 취리히에서 UBS 계좌를 열었다. 그리고 — 돌아오는 길.

9개월.

정순을 마지막으로 본 지 9개월.

대한이를 마지막으로 안은 지 9개월.

대한이는 — 열한 달이 되었다. 곧 첫 생일. 3월 1일. 3.1운동 1주년이자 대한이의 첫 번째 생일.

그 생일에 맞춰 돌아갈 수 있을까.

연재희가 수첩을 펼쳤다.

일월 십오일. 태평양.

돌아간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경성 → 상하이 → 샌프란시스코 → 뉴욕 → 리버풀 → 런던 → 파리 → 취리히 → 파리 → 리버풀 → 뉴욕 → 샌프란시스코 → 태평양.

지구를 한 바퀴 돌아 — 다시 태평양이다.

가져온 것: UBS 계좌 하나, 금고 열쇠 하나(봉기에게 맡김), 뮐러 박사의 약속.

두고 온 것: 수첩(금고 42번), 정순의 손수건(금고 42번).

안고 가는 것: 만년필 하나, 두려움 하나, 각오 하나.

"Mr. Yeon!"

갑판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호.

뉴욕에서 만난 김호가 — 연재희의 귀환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까지 왔다. 그리고 같은 배를 탔다.

"왜 같이 타신 겁니까, 형씨."

"혼자 보내면 중간에 바다에 빠질 것 같아서."

김호가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 진짜 위험해서 같이 타는 거요."

김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재희 씨,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에서 움직임이 있소."

"영사관?"

"일본 영사관. 당신 이름이 —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소문이 있소."

블랙리스트.

일본 영사관의 '요주의 인물' 명단.

"누가 그런 소문을?"

"영사관에서 일하는 한인 통역관이 귀띔해줬소. '연재희'라는 이름이 도쿄에서 직접 내려온 명단에 있다고."

도쿄.

쿠로카와의 전보가 도쿄에 갔고, 도쿄가 전 세계 재외공관에 명단을 내렸을 것이다.

"경성에 도착하면 — 바로 잡히겠군요."

"그래서요." 김호가 말했다. "경성으로 직접 들어가면 안 되오."

"그럼 어떻게?"

"부산으로 들어가시오. 부산항이 인천항보다 감시가 덜하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 대구, 대전을 거쳐 경성으로."

"부산……"

"그리고 — 가명을 쓰시오. 여권이 없으니 어차피 밀입국인데, 부산의 한인 네트워크가 도와줄 것이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 형씨, 고맙소."

"고마운 건 나라가 독립하면 그때 말하시오."
<hr>
1920년 2월 5일. 부산항.

오리건호가 부산 근해에서 작은 어선으로 갈아탔다.

밀입국.

부산항 정문으로 들어가면 — 일본 세관의 검문이 있었다. 연재희의 얼굴이 블랙리스트에 있다면 — 즉시 체포.

그래서 어선으로 — 부산 영도의 작은 포구에 내렸다.

새벽 네 시.

어둠 속에서 발을 디뎠다.

조선 땅.

9개월 만의 조선.

차가운 2월의 공기. 바다 냄새. 생선 비린내. 그리고 — 조선어.

포구의 어부가 말했다.

"어데서 왔소?"

"멀리서 왔소."

"배 타고?"

"배 타고."

조선어.

9개월 만에 듣는 조선어가 — 귀에 달콤했다.

연재희가 포구에서 올라왔다. 영도의 좁은 골목. 김호가 미리 연락해둔 부산의 한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 선생이시오?"

"……네."

"김호 씨한테 연락 받았소. 이쪽으로."

좁은 한옥. 아궁이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 따뜻했다.

연재희가 — 9개월 만에 따뜻한 방에 앉았다.

온돌의 온기가 엉덩이에서 등으로, 등에서 어깨로 올라왔다.

이것이 — 조선이었다.

스위스의 호텔도, 뉴욕의 여관도, 파리의 다락방도 — 이 온기를 줄 수 없었다.

연재희가 — 울었다.

소리 없이.
<hr>
2월 10일. 부산에서 경성으로.

기차를 탔다. 가명으로. '이정수'라는 이름으로.

부산역. 밀양. 대구. 김천. 대전. 천안. 수원. 그리고 — 경성.

기차 안에서 창밖을 보았다.

조선의 겨울 풍경. 논이 얼어붙어 있었고, 산에 눈이 쌓여 있었고, 마을마다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

역마다 일본 경찰이 보였다. 3.1운동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문화통치라는 이름 아래 — 감시의 눈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연재희가 모자를 눌러 썼다.

경성역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었다.

역 앞.

9개월 전과 달라지지 않은 풍경. 남대문이 보였고, 전차가 지나갔고,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 경찰이 많았다.

역 출구에서 검문을 하고 있었다.

연재희가 검문을 피해 — 옆문으로 빠져나왔다.

종로 방향으로 걸었다.

밤이었다.

종로의 거리. 국밥집. 이발소. 전당포. 한씨상회.

한상철의 잡화상 앞을 지나갔다.

모르는 가게였다. 이름도 처음 보는 가게. 그러나 — 장윤보가 편지에서 경고한 이름.

'한상철. 종로 잡화상. 헌병대 출입이 잦다.'

연재희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잡화상 안에 불이 꺼져 있었다.

한상철은 — 안에 없었다.

아니, 있었다.

뒷방에서.

바닥판 아래의 비밀 공간에서 —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hr>
연재희가 장윤보의 집에 도착한 것은 밤 아홉 시였다.

뒷문을 두드렸다. 약속된 방식으로 — 세 번, 두 번, 세 번.

문이 열렸다.

장윤보의 얼굴이 보였다.

"재희……"

"형."

두 남자가 포옹했다.

9개월.

장윤보의 품이 따뜻했다. 조선의 따뜻함. 동지의 따뜻함.

"들어와. 빨리."

장윤보의 집 안방. 등유 램프. 온돌.

"형, 먼저 — 정순이는?"

장윤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살아 있다."

"기침은?"

"……나빠졌다."

연재희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서광제가 매일 가고 있다. 약을 바꿨는데…… 효과가 없다."

"대한이는?"

"대한이는 건강하다. 걷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했다.

아들이 — 걷기 시작했다.

연재희가 이를 악물었다.

"형, 정순이 집에 가야 하오."

"지금은 안 돼."

"왜?"

"네 집에 — 감시가 붙어 있다."

연재희의 눈이 커졌다.

"감시?"

"한상철이란 놈이 — 네 집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헌병대에서 직접 사복 경찰을 붙여놨다. 네가 돌아오면 잡으려고."

"어떻게 아시오?"

"조만석이 확인했다. 시장 사람들이 봤어. 네 집 골목에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다고."

연재희가 주먹을 쥐었다.

9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 집에도 갈 수 없었다.

아내를 볼 수 없었다.

아들을 안을 수 없었다.

"형, 방법이 없소?"

장윤보가 생각했다.

"하나 있다."

"뭐요?"

"정순이를 — 여기로 데려오겠다."

"여기?"

"내 집이면 — 한상철도 쉽게 접근 못 한다. 내 집에는 내 사람들이 있으니까."

연재희가 장윤보의 손을 잡았다.

"형, 고맙소."

"고마운 건 나라가 독립하면 —"

"김호 형씨도 같은 말을 했소."

두 남자가 — 쓴 웃음을 지었다.

나라가 독립하면.

그 '독립'이 언제 올지 — 아무도 몰랐다.
<hr>
2월 12일. 밤. 장윤보의 집.

정순이 왔다.

서광제가 부축하고, 조만석이 호위하여 — 야밤에 정순을 장윤보의 집으로 데려왔다. 대한이는 정순의 등에 업혀 있었다.

연재희가 방문을 열었다.

정순이 서 있었다.

9개월 전보다 — 말라 있었다. 뺨이 더 움푹 들어갔고, 눈 밑에 그늘이 짙었다. 그러나 — 눈은 빛나고 있었다.

"재희 씨."

정순이 말했다.

연재희가 — 아무 말도 못 했다.

정순의 등에서 — 대한이가 고개를 들었다.

열한 달.

3월이면 첫 생일.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보는 아이. 아니, 세 달 때 봤으니 기억은 못 하지만.

대한이가 —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낯선 남자.

대한이가 — 울음을 터뜨렸다.

"으으아아——!"

아버지를 몰라보는 아이.

연재희의 눈에서 — 눈물이 흘렀다.

"대한아……"

연재희가 아이를 안았다. 대한이가 발버둥 쳤다. 울었다. 낯선 남자의 품이 싫었다.

그러나 연재희는 놓지 않았다.

안았다. 꼭.

1분.

2분.

대한이의 울음이 — 잦아들었다.

아이의 손이 — 연재희의 옷깃을 잡았다.

만년필이 꽂힌 옷깃을.

대한이의 작은 손가락이 — 만년필의 '眞實' 두 글자를 만졌다.

만년필이 — 금빛으로 빛났다.

대한이가 — 웃었다.

울다가 — 웃었다.

"봐, 이 아이가 — 만년필을 좋아하네."

정순이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웃으며.

연재희가 정순을 바라보았다.

"정순아."

"네."

"미안하오."

"미안하지 마세요."

정순이 연재희의 옆에 앉았다.

"재희 씨가 — 큰일을 하고 왔다는 거, 알아요."

"어떻게?"

"장윤보 선생님이 — 조금만 말씀해주셨어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재희 씨가 나라를 위해 — 아주 먼 곳까지 갔다 왔다고."

연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정순아, 나는 — 나쁜 남편이오."

"아니에요."

"아내가 아프고 아이가 자라는데 — 나라 타령이나 하고."

"재희 씨." 정순이 연재희의 손을 잡았다. "나쁜 남편은 —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에요. 재희 씨는 — 돌아왔잖아요."

대한이가 두 사람 사이에서 — 만년필을 잡고 있었다.

작은 손.

111년 뒤에 그 만년필을 잡을 5세대의 첫 번째 손.

연재희가 아내와 아들을 안았다.

장윤보의 집 안방.

온돌의 온기.

9개월 만의 가족.

그 밤, 연재희는 — 잠들지 못했다.

정순의 기침 소리가 밤새 들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