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Part 7
Part 7 — 10가문의 재산 (1919년 11월, 경성/취리히)
1919년 11월 1일. 경성 종로. 장윤보의 무역상 2층.
밤 열 시.
장윤보가 10가문을 소집했다.
3.1운동 이후 — 이것이 두 번째 소집이었다. 첫 번째는 3월 1일 밤, 연재희의 아이가 태어난 그 밤이었다. 그때 10가문은 맹세했다. 재산의 절반을 독립자금으로 내놓겠다고.
7개월이 지났다.
장윤보의 2층 사무실. 좁은 방. 등유 램프 하나.
연재희는 없었다. 스위스에 있으니까.
나머지 아홉 명이 모였다.
장윤보(46). 백경수(31). 조만석(41). 서광제(38). 이상덕(32). 최동진(44). 한예린(25). 송학주(24). 윤달성(36).
그리고 — 연재희의 자리에, 연재희의 아내 정순이 앉아 있었다.
정순.
스물넷. 기침이 잦았다. 마른 체구.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 눈이 단단했다.
서광제가 정순의 옆에 앉았다. 의사로서 — 정순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정순 씨, 몸은 괜찮으시오?"
"괜찮습니다."
정순이 웃었다. 기침을 한 번 했다.
장윤보가 자리에 섰다.
"시작합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재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장윤보가 편지를 꺼냈다. 스위스에서 온 편지. 연재희의 필적.
"금고를 열었다고 합니다."
"금고?"
조만석이 물었다.
"스위스 은행. UBS. 계좌를 개설했습니다."
방 안에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돈을 보내야 합니다."
장윤보가 각 가문의 당주를 바라보았다.
"3월에 맹세한 대로 — 재산의 절반. 지금부터 현금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얼마나…… 빨리?"
백경수가 물었다.
"12월까지. 한 달 반."
"한 달 반 안에 — 재산의 절반을?"
"그렇습니다."
침묵.
이상덕이 먼저 말했다. 군인 출신답게 직설적으로.
"내 재산이라 해봐야 —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논 200석지기와 군마 세 필이오. 현금으로 바꾸면…… 대략 30만 원(圓). 미화로 15만 달러쯤."
"15만 달러." 장윤보가 적었다.
조만석.
"시장의 건물과 상권 절반. 현금화하면…… 어려워요, 형. 시장은 사고파는 게 아니라 — 사람들의 삶이거든."
"만석아."
장윤보가 조만석을 바라보았다.
"나라가 없으면 — 시장도 없어."
조만석이 이를 악물었다.
"……100만 원. 미화 50만 달러."
백경수.
"사진관 건물과 부동산.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경성 서쪽 토지. 합치면 — 60만 원. 30만 달러."
서광제.
"병원 건물과 의료 기기. 약재 창고. 70만 원. 35만 달러."
최동진.
"서당과 소장 서적, 여의도 땅. 40만 원. 20만 달러."
한예린.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북촌 한옥 세 채. 50만 원. 25만 달러."
송학주.
"인쇄 기기와 활자. 솔직히 말하면…… 돈이 되는 게 별로 없소. 20만 원. 10만 달러."
윤달성.
"공장 기계와 특허. 실험실 장비. 80만 원. 40만 달러."
장윤보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몫을 적었다.
"무역선 두 척. 인천항 창고. 상하이 사무소. 부산 토지. 합치면 — 500만 원. 미화 250만 달러."
장윤보가 숫자를 더했다.
이상덕: $150,000
조만석: $500,000
백경수: $300,000
서광제: $350,000
최동진: $200,000
한예린: $250,000
송학주: $100,000
윤달성: $400,000
장윤보: $2,500,000
연재희(미주 모금): $12,847
합계: $4,762,847
장윤보가 숫자를 바라보았다.
"480만 달러……"
2,000만 달러에는 — 한참 못 미쳤다.
"나머지 1,500만 달러는?"
윤달성이 물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소." 장윤보가 말했다. "하나, 미주 한인 사회의 추가 모금. 재희가 미주 순회에서 모은 것은 $12,847이지만 —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오. 미주에 한인이 5,000명 가까이 있소. 장기 모금을 하면 — 수백만 달러가 더 모일 수 있소."
"그건 시간이 걸리지 않소?"
"걸리오. 그래서 — 두 번째 방법."
장윤보가 종이를 뒤집었다.
"10가문 외의 조선인 부호들. 개성의 상인들. 평양의 지주들. 함경도의 무역상들. 전국에 — 독립에 뜻을 둔 부자들이 있소."
"그 사람들이 — 돈을 내겠소?"
"재희가 미국에서 증명했소.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도, 세탁소의 이민자도 — 나라를 위해 돈을 내놓았소. 하물며 조선 팔도의 부호들이 안 내겠소?"
장윤보의 눈이 빛났다.
"내가 — 직접 돌겠소. 경성에서 개성. 개성에서 평양. 평양에서 함흥. 전국의 뜻있는 이들을 만나겠소."
"위험하지 않소?" 서광제가 물었다. "밀정이 돌아다니는데."
"한상철."
장윤보가 그 이름을 말했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한상철이 — 우리를 추적하고 있소.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 분명히 냄새를 맡고 있소."
"어떻게 아시오?"
"느낌이오." 장윤보가 말했다. "종로에서 40년을 살았소. 쥐가 움직이는 것은 — 느낌으로 안다."
"한상철을…… 어떻게 하시겠소?"
"당분간은 내버려두겠소. 섣불리 건드리면 — 오히려 의심을 사오. 한상철이 아는 것은 아직 표면적인 것들이오. 10가문이 있다는 것 정도. 자금의 규모나 스위스 계좌는 모를 것이오."
"만약 알게 되면?"
장윤보가 침묵했다.
3초.
"그때는…… 10가문이 결정해야 하오."
무거운 말이었다.
10가문이 결정한다. 밀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 이 자리에서 꺼내기 어려운 종류의 결정이었다.
정순이 —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방 안의 시선이 정순에게 쏠렸다.
서광제가 정순의 등을 두드렸다.
"정순 씨, 괜찮으시오?"
"괜찮습니다."
정순이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손수건에 —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직은.
"정순 씨, 재희에게 전할 말이 있으시오?"
장윤보가 물었다.
정순이 고개를 들었다.
"있습니다."
"뭐요?"
정순이 품속에서 —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흰 면 손수건. 가장자리에 자수가 놓여 있었다. 빨간 실로 — '眞實' 두 글자.
"재희 씨가…… 떠나기 전에 제가 수를 놓았습니다. 만년필에 새겨진 것과 같은 글자를."
정순이 손수건을 장윤보에게 건넸다.
"이것을…… 전해주십시오."
장윤보가 손수건을 받았다.
'眞實'.
진실.
연재희의 만년필에 새겨진 두 글자.
정순의 손수건에 수놓인 두 글자.
같은 글자. 같은 마음.
"전하겠소."
장윤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임이 끝났다. 아홉 명이 하나둘 떠났다.
정순이 마지막으로 나섰다. 서광제가 부축했다.
"정순 씨, 약을 바꿔봅시다. 새로 들어온 독일제 약이 —"
"광제 선생님."
"네."
"저 — 알고 있어요. 이 기침이…… 보통 기침이 아니라는 거."
서광제의 손이 멈췄다.
"정순 씨……"
"재희 씨가 돌아올 때까지만 — 버티면 됩니다."
정순이 웃었다. 창백한 웃음.
"대한이가…… 아버지 얼굴을 알 때까지만."
서광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폐결핵.
1919년에 —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병.
정순은 알고 있었다.
연재희만 — 아직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 스위스로 갔을 것이다.
나라와 아내 사이에서.
진실과 사랑 사이에서.
연재희는 — 진실을 선택했다.
그 선택의 대가를 — 아직 치르지 않았을 뿐.
<hr>
11월 10일. 취리히.
연재희가 UBS 뮐러 이사를 다시 만났다.
"뮐러 박사, 자금 이동 경로에 대해 논의하고 싶습니다."
뮐러의 사무실. 원목 테이블. 창밖의 리마트 강.
진봉기가 동석했다. 장윤보의 조카. 베른 법학도. 스위스 사정에 밝은 청년.
"경로가 복잡합니다." 연재희가 말했다. "조선에서 직접 스위스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일본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상하이를 거쳐 — 금으로 변환한 뒤 — 해상으로 마르세유까지. 마르세유에서 육로로 취리히까지."
뮐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적 운송이군요.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경로를 병행하겠습니다."
연재희가 종이에 그렸다.
경로 1 (물리적):
경성 → 인천항 → 상하이 → [금 변환] → 마르세유 → 취리히
경로 2 (금융적):
미주 모금 → 뉴욕 은행 → 런던 HSBC → UBS 취리히
"경로 2는 기록이 남습니다." 뮐러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 경로 2는 소액만. 미주 모금 분. 이 돈은 '미국 한인 사회의 자선 모금'이라는 명목이 있으니까 — 추적당해도 문제가 적습니다."
"대규모 자금은?"
"경로 1. 금으로. 물리적으로."
뮐러가 생각했다.
"Mr. Yeon,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뭡니까?"
"UBS는 마르세유에 대리인이 있습니다. 금을 마르세유까지 가져오시면 — 우리 대리인이 인수하여 취리히까지 안전하게 운송합니다."
"UBS가 그런 서비스를?"
뮐러가 미소를 지었다.
"Mr. Yeon. 2,000만 달러 고객에게는 — 어떤 서비스도 가능합니다."
진봉기가 끼어들었다.
"마르세유의 대리인은 — 신뢰할 수 있습니까?"
"UBS의 직원입니다. 30년 경력. 러시아 혁명 때 로마노프 왕가의 재산도 그를 통해 운송되었습니다."
러시아 황실의 재산.
진봉기와 연재희가 눈을 마주쳤다.
"좋습니다." 연재희가 말했다. "마르세유까지만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언제 첫 번째 배가 도착합니까?"
연재희가 계산했다.
상하이의 조봉출이 11월 초에 무역선을 보낸다면 — 마르세유까지 30일. 12월 초.
"12월 초."
"알겠습니다. 마르세유 대리인에게 통보하겠습니다."
뮐러가 서류를 꺼냈다.
"하나 더, Mr. Yeon."
"네."
"이 계좌의 장기 관리에 대해서입니다."
"장기?"
"당신이 말한 111년. 그 기간 동안 — 계좌를 어떻게 관리할 것입니까?"
연재희가 생각했다.
111년.
자신은 111년을 살 수 없었다. 아들 대한도. 그 아들의 아들도.
"세대 간 전승이 필요합니다."
"정확히." 뮐러가 서류를 건넸다. "UBS에는 'Dynasty Account'라는 상품이 있습니다. 다세대 계좌. 계좌 소유자가 사망하면 — 사전에 지정된 상속자에게 자동으로 이전됩니다."
"상속자를 지정할 수 있습니까?"
"이름과 생년월일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 접근 조건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접근 조건?"
"예를 들어 —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인출 불가.' 그런 조건."
연재희의 눈이 빛났다.
"한 가지 조건만."
"말씀하세요."
"한국이 하나가 될 때."
뮐러가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Korea becomes one? You mean — unification?"
"Yes. When the Korean peninsula is unified — and only then — can this money be fully accessed."
뮐러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 멈췄다.
"Mr. Yeon…… what if that never happens?"
"It will happen."
"How can you be sure?"
연재희가 만년필을 만졌다. '眞實' 두 글자.
"Because the truth always wins. It just takes time."
뮐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 조건을 적었다.
계좌 조건:
– 한반도 통일 시까지 원금 인출 불가
– 이자 및 운용 수익은 UBS 재투자
– 세대 간 상속 허용 (최대 5세대)
– 각 세대 관리자는 연간 1회 방문 확인
– 최종 수혜자: 통일 한국 정부 또는 계좌 관리자
연재희가 서명했다.
만년필이 — 금빛으로 빛났다.
뮐러가 보았다. 이번에는 — 놀라지 않았다.
"그 빛…… 이전에도 봤습니다."
"빛이 나는 건 — 제가 옳은 일을 할 때인 것 같습니다."
"혹시 — 잘못된 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연재희가 웃었다.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 모르겠습니다."
뮐러가 서류를 정리했다.
"11월 17일에 공식 개설 완료 서류가 나옵니다. 그날이 — 이 계좌의 생일이 되겠군요."
11월 17일.
연통일이 2030년에 이 은행을 방문했을 때, 켈러가 말한 날짜.
"This account was opened on November 17, 1919."
111년 뒤에도 기억될 날짜.
연재희가 UBS를 나섰다.
취리히의 11월. 첫 눈이 — 알프스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연재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
경성에서도 눈이 올까.
정순이 눈을 보며 기침을 하고 있을까.
대한이가 — 아홉 달이 되었을 것이다. 기어다니기 시작했을까.
"조금만 더."
연재희가 말했다.
"조금만 더 — 그리고 돌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