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Part 3

Part 3 — UBS 45번지 (1919년 9월 11일~20일, 취리히)

은행 안은 고요했다.

대리석 바닥. 높은 천장. 샹들리에에서 내려오는 부드러운 빛. 창구에서는 서너 명의 직원이 조용히 일하고 있었다. 고객도 조용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서류를 건네고,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돈의 성전.

여기서는 모두가 경건했다.

"May I help you, sir?"

창구 직원이 불어 섞인 영어로 물었다.

"I'd like to open a private account."

"Certainly, sir. Your name?"

"Yeon. Jae-hee Yeon."

직원이 서류를 꺼냈다. 이름, 국적, 주소.

"Nationality?"

연재희가 멈췄다.

국적.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 1910년 이후, 국제적으로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다. 여권도 일본 여권이었다 — 아니, 연재희는 여권조차 없었다. 미국 입국 때 대한인국민회의 추천서와 임시정부의 비공식 서류로 통과했다.

"Korean."

연재희가 말했다.

"I'm sorry, sir…… Korea is not on our list of recognized nations."

"I know. But I am Korean."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Perhaps…… you could use 'Japan' as —"

"No."

연재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I will never write 'Japan' as my nationality."

직원이 잠시 당혹했다.

"Let me consult with my supervisor."

직원이 자리를 떠났다. 3분. 5분. 7분.

연재희가 은행 로비에 서서 기다렸다. 대리석 바닥에 자신의 발이 비치고 있었다. 먼지 낀 구두. 해진 바지 끝단.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온 차림.

이 은행의 다른 고객들 — 검은 정장에 은시계 줄, 가죽 서류가방 — 과는 격이 달랐다.

그러나 연재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10분 뒤, 직원이 돌아왔다. 옆에 —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Mr. Yeon. I'm Dr. Heinrich Müller. Director of International Accounts."

하인리히 뮐러. 국제계좌 담당 이사.

"Dr. Müller."

"Please, come this way."

별도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무거운 참나무 책상. 벽에 스위스 국기와 세계 지도.

뮐러가 앉으며 말했다.

"Mr. Yeon, my colleague tells me you wish to open an account. And that you refuse to list Japan as your nationality."

"That is correct."

"May I ask — what nationality shall we record?"

"Korean. Republic of Korea. Or — if your system doesn't allow it — stateless."

뮐러가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오래.

"Mr. Yeon…… I've been in banking for thirty-seven years. I've seen Russian aristocrats fleeing the revolution, Turkish merchants hiding from the Sultan, German Jews preparing for the worst. They all came here for the same reason."

"Safety."

"Yes. Safety. And secrecy."

뮐러가 안경을 벗고 닦았다.

"Switzerland does not judge where money comes from. We do not judge why people need secrecy. We only ask — is the money real, and will you comply with our terms?"

"The money is real."

"How much are we talking about?"

연재희가 숫자를 적었다.

$20,000,000.

뮐러의 손이 — 멈췄다.

"Twenty million dollars?"

"Not today. Today I have approximately $2,800. But within six months — twenty million."

뮐러가 숫자를 다시 보았다.

"Mr. Yeon, that is…… an extraordinary sum. For context — the entire annual budget of the Swiss federal government is approximately fifty million francs."

스위스 연방정부 1년 예산의 거의 절반.

"I understand."

"Where would this money come from?"

"From the Korean people. From ten families who have decided to protect their assets from Japanese seizure. Their land, their businesses, their generations of wealth."

"And they want to deposit it here."

"Here. Where it will be safe from Japan. From any government. For as long as it takes."

"As long as what takes?"

연재희가 뮐러의 눈을 바라보았다.

"As long as it takes for Korea to be free."

뮐러가 침묵했다.

시계가 째깍거렸다.

"Mr. Yeon."

뮐러가 말했다.

"I will personally oversee your account."

"Thank you."

"But I must warn you. Twenty million dollars — that kind of money attracts attention. Every intelligence service in Europe will be watching. The Japanese certainly have agents here."

"I know."

"Do you have a plan for the transfer?"

"I'm working on it."

뮐러가 서류를 꺼냈다.

"Let's start with the paperwork. Account holder: Yeon, Jae-hee. Nationality —" 뮐러가 연재희를 보았다. "— I'll write 'Korean, stateless.' Will that do?"

"That will do."

"Account type: numbered. This means your name will not appear on any external document. Only an account number."

뮐러가 숫자를 적었다.

CH-0042-1919-1101

스위스 번호 계좌.

1919년 11월 — 아직 9월이었지만, 뮐러는 정식 개설일을 11월로 잡았다. 서류가 완비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This number is your identity in our system. Guard it with your life."

뮐러가 종이를 건넸다.

"One more thing, Mr. Yeon."

"Yes?"

"This account — who else will have access?"

연재희가 생각했다.

자신이 죽으면 — 누가 이 계좌를 관리하는가.

연대한.

아직 여섯 달짜리 아기. 만세 소리 속에 태어난 아이.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아이.

"My son. Yeon Dae-han. Born March 1, 1919."

"An infant?"

"He will grow. And his son after him. And his son after that."

뮐러가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은행가의 눈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How many generations are you planning for, Mr. Yeon?"

"As many as it takes."

뮐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I've seen many clients plan for the next quarter. Some plan for the next year. Very few plan for the next decade." 뮐러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 자신의 만년필, 검은 몽블랑. "You, Mr. Yeon…… you're planning for a century."

"111 years."

연재희가 말했다.

왜 그 숫자가 나왔는지, 연재희 자신도 몰랐다. 그냥 — 입에서 나왔다.

111.

뮐러가 웃었다. 처음으로.

"111 years. I hope your bank lives that long."

"I hope my country lives that long."

서류에 서명했다.

연재희의 만년필로. '眞實' 두 글자가 새겨진 만년필로.

서명하는 순간 — 만년필이 금빛으로 빛났다.

뮐러가 보았다.

"That pen……"

"A gift. From the day Korea declared its freedom."

뮐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 그 빛은 보았다.

"Welcome to UBS, Mr. Yeon."

악수를 했다.

1919년 9월 11일.

111년의 금고가 — 열렸다.
<hr>
그 날 오후, 연재희는 리마트 강변을 걸었다.

취리히의 가을. 강물이 맑았다. 바닥의 자갈이 보일 만큼 맑았다.

연재희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계좌는 열었다.

그러나 — 돈은 아직 없었다. $2,800을 초기 예치금으로 넣었을 뿐. 2,000만 달러는 조선에 있고, 상하이에 있고, 미주에 흩어져 있었다.

어떻게 그 돈을 여기까지 가져올 것인가.

조선에서 직접? — 불가능하다. 일본이 감시하고 있다.

상하이를 거쳐? — 위험하다. 상하이는 각국 정보기관의 소굴이다.

미주에서 전신으로? — 추적당한다. 은행 간 전신 송금은 기록이 남는다.

연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강 건너편에 —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동양인.

거리가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 서 있는 자세가.

연재희를 보고 있었다.

연재희가 한 발짝 다가갔다.

남자가 돌아섰다. 그리고 — 골목으로 사라졌다.

파리에서 누군가가 호텔로 찾아왔다.

기차에서 사이토라는 일본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금 — 취리히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우연이 세 번 겹치면 —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었다.

연재희가 걸음을 빨리했다.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장윤보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자금 이동 루트를 알려줘야 했다.

그러나 — 편지도 안전하지 않았다. 누군가 우편물을 검열하고 있을 수 있었다.

"어떻게……"

연재희가 멈춰 섰다.

반호프슈트라세의 한가운데.

사방이 은행이었다. 돈이 넘쳐나는 거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

그러나 연재희에게는 — 이 거리가 감옥처럼 느껴졌다.

돈을 넣을 금고는 있는데, 돈을 가져올 길이 없었다.
<hr>
9월 15일. 취리히 올드타운의 싸구려 호텔.

연재희가 편지를 썼다.

세 통.

첫 번째 — 장윤보에게.

윤보 형.

취리히에 도착했소. 금고를 열었소.
그러나 열쇠가 없소. 열쇠를 보내주시오.

재희.

'금고를 열었다'는 UBS 계좌 개설. '열쇠'는 자금 이동 루트. 암호였다. 장윤보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두 번째 — 조봉출에게.

봉출 형.

상하이의 다리를 확인하시오.
다리가 안전하면 — 건너시오.
다리가 흔들리면 — 기다리시오.

재희.

'다리'는 자금 전달 경로. '건너다'는 자금 이동 실행. '흔들리다'는 감시 감지.

세 번째 — 정순에게.

정순아.

스위스에 왔소.
여기는 산이 높고 물이 맑소.
당신이 이 공기를 마시면 기침이 나을 것 같소.

반드시 돌아가겠소.
대한이에게 아버지가 먼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해 주시오.

재희.

이 편지는 — 부칠 수 있었다. 정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비밀이 없었다. 아내에게 보내는, 평범한 편지.

그러나 연재희의 손이 떨렸다.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말이 — 또다시 거짓이 될까 봐.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세 번.

연재희가 멈췄다.

이 호텔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명으로 투숙했다. 프런트에는 'J. Lee'라고 적었다.

똑. 똑.

두 번 더.

연재희가 만년필을 품속에 넣었다. 편지를 베개 밑에 밀어넣었다.

"Who is it?"

문 밖에서 — 일본어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사이토입니다. 기차에서 만났던."

사이토.

파리-취리히 야간열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일본인 청년.

연재희의 심장이 빨라졌다.

어떻게 이 호텔을 알았는가. 어떻게 방 번호를 알았는가. 가명으로 투숙했는데.

"뭐 — 무슨 일입니까."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실례가 된다면 —"

"아닙니다. 잠깐만요."

연재희가 편지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사이토 겐지가 서 있었다.

은테 안경. 깔끔한 양복. 작은 가방.

그러나 — 눈이 달랐다.

기차에서의 그 눈. 잠든 척하면서 연재희를 보던 그 눈.

지금은 — 숨기지 않고 있었다.

"연재희 씨."

사이토가 말했다.

연재희가 아닌 — 'J. Lee'라고 적어놓은 이름이 아닌 — 진짜 이름을.

"어떻게……"

"경성에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이토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누구인지 — 아직 모르시겠죠."

사이토가 품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봉투에 — 장윤보의 필적이 있었다.

"장윤보 선생이 보내셨습니다. '취리히에서 재희를 찾아라'고."

연재희의 눈이 커졌다.

"윤보 형이?"

"저는 사이토가 아닙니다." 청년이 안경을 벗었다. "진봉기. 장 가문의 사람입니다. 장윤보 선생의 조카."

진봉기.

장윤보의 조카.

10가문의 사람.

연재희의 긴장이 — 반만 풀렸다.

"왜 일본 이름을?"

"유학생 여권으로 왔습니다. 일본 유학생 '사이토 겐지'로. 이 여권이 아니면 유럽에 올 수 없으니까."

진봉기가 장윤보의 편지를 건넸다.

연재희가 봉투를 열었다.

재희에게.

진봉기를 보낸다.
내 조카다. 믿어도 된다.

봉기는 베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다.
스위스 사정에 밝다.

자금 이동에 봉기를 쓰거라.

그리고 — 경성의 소식을 전한다.

한상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로 헌병대에 드나들고 있다.
네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조심해라, 재희.

윤보.

연재희가 편지를 내려놓았다.

한상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로 헌병대.

밀정.

"한상철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연재희가 진봉기에게 물었다.

"종로 잡화상이지요. 삼촌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가 밀정이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삼촌은 — 거의 확신하고 계십니다."

연재희가 창밖을 보았다.

취리히의 밤.

리마트 강의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지구 반대편 경성에서 — 밀정이 움직이고 있었다. 연재희의 이름을 추적하고 있었다.

"봉기 씨."

"네."

"얼마나 시간이 있을 것 같소?"

"삼촌 말씀으로는 — 세 달. 길어야 석 달 안에 한상철이 모든 것을 알아낼 것이라고."

세 달.

9월부터 세면 — 12월.

12월까지. 그 안에 2,000만 달러를 조선에서 스위스로 옮겨야 한다.

"불가능하지 않소?"

진봉기가 웃었다. 젊은 남자의 당돌한 웃음.

"삼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 연재희 씨, 삼촌이 한마디 더 하셨는데요."

"뭐라고?"

"'재희는 미친 놈이니까 해낼 것이다.'"

연재희가 — 웃었다.

태평양에서도, 뉴욕에서도, 대서양에서도 들은 말.

미친 놈.

"합시다."

연재희가 말했다.

"세 달. 2,000만 달러. 스위스 금고까지."

진봉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시다."

두 사람이 악수했다.

취리히의 밤이 깊어갔다.

그리고 — 지구 반대편, 경성의 종로에서.

한상철이 헌병대의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품속에 — 연재희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백경수의 사진관에서 몰래 복사한 사진.

밀정의 그림자가 —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