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Part 1
Part 1 — 대서양을 건너야 한다 (1919년 9월 1일~15일, 뉴욕)
1919년 9월 1일.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 32번가의 한인회관.
연재희가 지도를 펼쳤다.
세계 지도. 한인회관 벽에 걸린, 누렇게 바랜 세계 지도. 태평양을 건너 미국 동부까지 왔고, 이제 대서양이 남아 있었다.
"스위스."
연재희가 손가락으로 유럽의 한가운데를 짚었다.
옆에 서 있던 김호가 고개를 저었다.
"재희 씨, 정신이 있소 없소."
김호. 뉴욕 한인회 총무. 마흔셋. 뉴욕에서 세탁소 세 곳을 운영하며 한인 사회의 살림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3.1운동 소식이 전해진 뒤 모금 운동에 앞장섰고, 연재희의 미주 순회를 처음부터 도운 사람이었다.
"태평양을 건넜으면 됐지, 대서양까지 건너겠다고?"
"건너야 합니다."
연재희가 말했다.
"모금한 돈이 지금 얼마요?"
"$12,847."
"그 돈 가지고 스위스를 가겠다?"
"이 돈만 가지고 가는 게 아닙니다."
연재희가 품속에서 편지 뭉치를 꺼냈다. 경성에서 온 편지들. 장윤보가 보낸 편지, 백경수가 보낸 편지, 조만석이 보낸 편지. 한 달 전에 도착한 것들이었다.
"경성의 10가문이 자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10가문?"
"3.1운동 그날 밤, 장윤보 형의 집에서 맹세한 열 가문입니다. 각자 재산의 절반을 내놓기로 했소."
김호의 눈이 커졌다.
"절반?"
"장 가문의 무역 재산, 조 가문의 시장 재산, 백 가문의 부동산…… 합치면."
연재희가 숫자를 적었다. 종이에 만년필로.
$15,000,000.
"천오백만 달러?"
김호가 숫자를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이게…… 가능한 숫자요?"
"10가문이 100년 동안 모은 재산입니다. 조선 팔도의 토지, 상권, 무역…… 일본이 빼앗기 전에 현금화해야 합니다."
연재희의 눈이 단단했다.
"이 돈이 일본 손에 넘어가면 — 독립은 불가능합니다. 일본이 우리 재산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겁니다."
김호가 침묵했다.
연재희가 지도의 스위스를 다시 짚었다.
"스위스는 중립국입니다. 1차대전 때도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소. 은행 비밀법이 있어서 — 예금자의 정보를 어느 나라에도 공개하지 않습니다."
"일본한테도?"
"일본한테도. 영국한테도. 미국한테도."
"……어떻게 아시오?"
연재희가 웃었다. 씁쓸한 웃음.
"태평양 위에서 21일 동안 책을 읽었습니다. 진 선주가 준 책 중에 스위스 은행에 관한 것이 있었소. 영국 은행가가 쓴 책이었는데 — 유럽의 왕실들이 전쟁에 대비해 스위스에 자산을 숨긴다는 내용이었소."
"왕실이 하는 짓을 조선 독립운동가가 한다?"
"왕실이 할 수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소."
김호가 한참 동안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 씨, 당신 정말……"
"미친 놈이지요."
연재희가 먼저 말했다.
진 선주의 말이 떠올랐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폭풍 속에서 들은 말.
"미친 놈은 잘 안 죽는다."
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 지갑을 열었다.
"배삯은 내가 내겠소."
"형씨……"
"뉴욕에서 리버풀까지 3등 객실이 $35요. 리버풀에서 파리 기차가 $12. 파리에서 취리히가…… $8 정도 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 대신 — 살아서 돌아오시오. 정순 씨가 기다리고 있지 않소."
정순.
그 이름에 연재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윤보의 편지가 떠올랐다. '정순의 기침이 심해졌다.' 서광제가 매일 방문한다. 약을 구하려 하지만 — 폐결핵은 쉽지 않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겠습니다."
연재희가 말했다.
그러나 — '빨리'가 얼마나 걸릴지, 연재희 자신도 몰랐다.
<hr>
9월 3일. 뉴욕 항.
화이트스타 라인의 SS 셀틱호가 정박해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대서양 항로가 다시 열리기 시작한 때. 전쟁 중 독일 U보트에 의해 침몰한 배들의 이름이 아직 신문에 오르내리던 시절.
"U보트가 아직 있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소."
김호가 부두에서 말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바다가 안전해지는 건 아니지."
연재희가 배를 올려다보았다. 셀틱호. 2만 톤급. 태평양을 건넌 순천호보다 훨씬 컸지만 — 낡아 보였다. 전쟁 중 수송선으로 징발되었다가 다시 여객선으로 복귀한 배.
"5일이면 리버풀에 도착합니다."
"5일……"
연재희가 품속을 만졌다. 만년필이 있었다. 수첩이 있었다. 그리고 — 두 통의 편지.
첫 번째 편지: 장윤보에게 보내는 답장. '자금을 상하이로 보내지 말 것. 새 루트를 찾겠음.'
두 번째 편지: 정순에게 쓴 편지.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반드시 돌아가겠다.'
두 편지 모두 부치지 못했다.
첫 번째는 — 밀정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윤보가 마지막 편지에서 경고했다. '경성에 이상한 놈이 돌아다닌다. 종로 잡화상 한상철이라는 자. 헌병대 출입이 잦다.'
두 번째는 — 연재희 스스로 부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말이 거짓이 될까 봐 두려웠다. 태평양 위에서 일곱 통의 편지를 쓰고 한 통도 부치지 못한 남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시오."
김호가 연재희의 손을 잡았다.
"뉴욕의 동포들이 기도하겠소."
"형씨."
"응?"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런 소리 마시오."
"만약에. 만약에 돌아오지 못하면 — 경성의 장윤보 형에게 연락해 주시오. '스위스에 갔다'고만."
"……"
"그 한마디면 장 형이 알아서 할 것이오."
김호가 연재희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살아서 돌아오시오. 약속하시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 배에 올랐다.
3등 객실. 태평양의 3등 객실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침대가 있었고, 물이 새지는 않았다.
연재희가 좁은 침대에 앉았다.
수첩을 펼쳤다.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구월 삼일. 뉴욕.
대서양을 건넌다.
태평양에 이어 두 번째 바다.
이번에는 혼자다.
진 선주도 없고, 소명이도 없다.
이번 바다는 — 혼자 건너야 한다.
만년필의 '眞實' 두 글자가 — 희미하게 빛났다.
이번에는 금빛이 아니었다.
붉은빛.
경고의 색.
연재희가 만년필을 올려다보았다.
"……왜 붉은 빛이지?"
만년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재희의 등줄기에 — 한기가 흘렀다.
태평양 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한기.
누군가 — 자신을 쫓고 있다는 느낌.
밀정의 그림자가 —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hr>
9월 5일. 대서양 한가운데.
셀틱호의 3등 갑판에서 연재희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태평양과 달랐다.
태평양은 넓고, 푸르고, 무심했다. 대서양은 — 검었다. 짙은 회색빛 파도가 끊임없이 배를 흔들었고, 하늘은 낮게 깔린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1차대전의 잔해가 아직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 평범한 바다였다.
그러나 연재희는 알고 있었다. 이 바다 밑에 루시타니아호의 잔해가 있다는 것을. 1,198명의 목숨이 U보트의 어뢰 한 발에 사라졌다는 것을.
"전쟁은 끝났는데……"
연재희가 혼잣말을 했다.
"전쟁은 끝났는데, 왜 바다가 이렇게 무거운 거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Because the dead are still down there."
영어. 영국식 발음.
연재희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 하나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흔 안팎. 회색 양복에 중절모. 코트 없이 — 대서양의 바람을 맞고 있었다.
"Excuse me?"
"The dead. They're still at the bottom. The sea remembers what we try to forget."
바다는 우리가 잊으려는 것을 기억한다.
연재희가 그 말에 멈췄다.
"You're not English."
남자가 연재희를 보며 말했다.
"I'm Korean."
"Korean?" 남자가 눈썹을 올렸다. "From where?"
"Joseon. Or…… what used to be Joseon. Korea."
"Ah."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The March protests. I read about it in The Times."
3월의 시위. 런던 타임스에도 실렸다. 3.1운동.
"You were there?"
"I was."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Arthur Whitfield. Foreign correspondent. The Manchester Guardian."
아서 휘트필드. 맨체스터 가디언 특파원.
연재희가 그 손을 잡았다.
"Jae-hee Yeon."
"And what brings a Korean to the Atlantic, Mr. Yeon?"
연재희가 잠깐 망설였다.
기자. 영국 기자.
이 남자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Business."
"What kind of business?"
"The kind that requires a Swiss bank."
휘트필드가 웃었다.
"Everyone has business with Swiss banks these days. The war made everyone paranoid about their money."
"My money is not about paranoia. It's about survival."
휘트필드의 웃음이 멈췄다.
"Survival?"
"My country has been occupied for nine years. Our assets are being seized. Our people are being killed. If we don't move the money now — there won't be anything left to fight with."
연재희가 그 말을 하고 나서 — 후회했다.
너무 많이 말했다.
그러나 휘트필드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기자의 눈. 이야기를 발견한 눈.
"Mr. Yeon…… would you mind if I wrote about this?"
"No."
연재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Please, no. If the Japanese find out — people will die."
휘트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I understand. Off the record, then."
"Thank you."
"But Mr. Yeon — one thing."
"Yes?"
"Be careful in Zürich. The Swiss are neutral, but neutral doesn't mean safe. Every intelligence service in Europe has eyes in Swiss banks. Including the Japanese."
일본 정보부가 스위스 은행에도 눈이 있다.
연재희의 등줄기에 다시 한기가 흘렀다.
만년필이 주머니 안에서 —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hr>
9월 7일. 리버풀.
셀틱호가 입항했다.
리버풀 항구는 전쟁의 상처가 선명했다. 부두의 절반이 아직 복구 중이었고, 창고 벽에는 폭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군복 차림의 남자들이 부두를 서성이고 있었다 —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연재희가 짐을 들고 내렸다.
짐이라고 해봐야 — 보자기 하나. 옷 한 벌, 수첩, 만년필, 그리고 김호가 건넨 여비가 든 봉투.
"Good luck, Mr. Yeon."
휘트필드가 부두에서 말했다.
"We'll meet again."
"I hope so."
"Here." 휘트필드가 명함을 건넸다. "If you ever need help in Europe — or a friendly journalist."
연재희가 명함을 받았다. Arthur Whitfield, Senior Correspondent, The Manchester Guardian. 맨체스터 주소와 런던 주소가 적혀 있었다.
"Thank you, Mr. Whitfield."
"Arthur. Call me Arthur."
"Arthur."
연재희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 영국 땅에 첫 발을 디뎠다.
유럽이었다.
조선에서 7,000마일. 뉴욕에서 3,000마일. 지구를 반 바퀴 돌아 — 여기까지 왔다.
리버풀 역. 런던행 기차를 타야 했다. 런던에서 도버. 도버에서 페리로 칼레. 칼레에서 파리. 파리에서 취리히.
아직 — 먼 길이었다.
연재희가 기차표를 샀다. 리버풀에서 런던까지 4시간. 3등석 £1 2실링.
기차에 올랐다. 좁은 좌석. 맞은편에 군복을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왼팔이 없었다. 빈 소매가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청년이 먼저 말을 걸었다.
"Where are you from, mate?"
"Korea."
"Where's that?"
"Far East. Next to Japan."
"Japan!" 청년이 웃었다. 쓴 웃음. "They were on our side, weren't they? The war."
"Yes. They were on your side."
"Funny, isn't it. Our allies are your enemy."
연재희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
1차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국 편이었다. 영국의 동맹국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독립을 영국이 지지할 리 없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대표단이 외면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
"Sorry about that."
청년이 말했다.
"I lost my arm fighting the Germans. You lost your country to the Japanese. And here we are — on the same train."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Here we are."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 시골 풍경이 창밖으로 흘러갔다. 초록빛 들판. 양 떼. 돌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 이 평화 아래에 100만 영국 청년의 피가 젖어 있었다.
연재희가 수첩을 펼쳤다.
구월 칠일. 리버풀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 안.
유럽은 전쟁이 끝난 뒤의 세계다.
조선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세계다.
여기 사람들은 전쟁을 끝내고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우리는 아직 — 전쟁을 시작도 못했다.
팔 하나를 잃은 영국 청년이 물었다.
"일본이 너희 적이냐."
그렇다고 했다.
"일본은 우리 동맹이었는데." 라고 청년이 웃었다.
세상은 — 이렇게 돌아간다.
나라를 잃은 자의 적은, 나라를 가진 자의 친구다.
그래서 — 돈이 필요하다.
친구도, 동맹도 없는 우리에게는 — 돈만이 무기다.
스위스까지.
반드시.
기차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밤이었다.
연재희가 빅토리아 역에 내렸다. 런던의 안개. 가스등이 희미하게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전쟁 후의 런던은 — 슬프고 아름다웠다.
역 근처의 싸구려 여관에 방을 잡았다. 1박 3실링. 침대 하나, 세면대 하나, 창문 하나.
창밖으로 런던의 밤이 보였다.
빅벤의 종소리가 — 멀리서 열 번 울렸다.
연재희가 침대에 누웠다.
정순을 생각했다.
지금 경성은 아침이었다. 정순이 기침을 하며 일어나고 있을 시간. 대한이가 — 여섯 달이 되었을 것이다. 이가 나기 시작했을까. 옹알이를 하고 있을까.
"정순아."
연재희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대서양을 건넜다.
이제 유럽 대륙을 건너면 — 스위스다.
연재희가 눈을 감았다.
주머니 안에서, 만년필의 붉은 빛이 — 아주 천천히 사라졌다.
잠들기 직전, 연재희는 듣지 못했다.
여관 복도에서 — 누군가의 발소리가 멈추는 것을.
연재희의 방문 앞에서.
3초.
그리고 —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