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프롤로그
프롤로그 — 잠기지 않는 금고 (2030년 9월 3일)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 45번지. UBS 본점.
연통일이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
스무 살.
2010년 10월 9일생. 한글날에 태어난 아이. 아버지 연만세가 "통일이가 스무 살이 되면"이라고 말하던 그 스무 살이 되었다.
취리히의 9월은 서늘했다. 리마트 강을 따라 걸어온 연통일의 볼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서울대 미디어학과 1학년 — 아버지가 졸업한 학교, 할아버지가 졸업한 학교, 증조할아버지가 세운 신문사의 DNA가 흐르는 학과.
"Guten Tag."
접수대의 여직원이 미소를 지었다.
연통일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아버지가 건넨 봉투. 인천공항에서, 아버지 연만세가 아들의 손에 이것을 쥐여주며 말했다.
"열어보지 마. 은행에 가서 그대로 내밀어."
봉투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연통일은 열어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열어보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버지를 믿으니까.
"I'd like to access a private account."
연통일이 영어로 말했다.
여직원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Your name, sir?"
"Yeon. Tong-il Yeon."
여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을 보더니 — 멈췄다.
3초.
5초.
여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직업적 미소가 사라지고, 무언가 경외에 가까운 것이 떠올라 있었다.
"Mr. Yeon, please wait a moment."
여직원이 자리를 떠났다. 1분 뒤 돌아왔다. 그 옆에 회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Mr. Yeon. I'm Friedrich Keller, Senior Director of Private Wealth Management."
프리드리히 켈러. 시니어 디렉터가 직접 나왔다. 스무 살 청년 앞에.
"Please follow me."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 일반 고객은 올 수 없는 층. 카드를 찍고, 복도를 걸었다. 벽에는 스위스 산맥의 사진 대신,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가 걸려 있었다. 그 그림 한 점이 서울 아파트 한 채보다 비쌀 것이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원목 테이블. 창밖으로 취리히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멀리 보였다.
"Please, sit down."
연통일이 앉았다.
켈러가 봉투를 받아 들었다. 개봉했다. 종이를 읽었다.
이번에는 — 10초 이상 멈췄다.
켈러가 연통일을 바라보았다.
"Mr. Yeon…… this account was opened on November 17, 1919."
1919년 11월 17일.
111년 전.
"Your great-great-grandfather, Mr. Jae-hee Yeon, opened this account."
증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 — 가 아니라. 고조할아버지. 연재희. 1919년에 스물일곱 살이었던 청년.
연통일의 심장이 빨라졌다.
아버지가 인천공항에서 말했다.
"통일아. 이번 여행이 끝나면 — 너에게 모든 걸 말해줄게."
그 '모든 것'이 — 이 은행에 있었다.
켈러가 태블릿을 건넸다. 화면에 숫자가 떠 있었다.
연통일이 읽었다.
읽었는데 — 이해할 수 없었다.
"This can't be right."
연통일이 말했다.
켈러가 미소를 지었다. 111년간 이 계좌를 관리해온 은행의 미소.
"It is correct, Mr. Yeon. To the cent."
연통일이 다시 화면을 보았다.
$26,000,000,000.
260억 달러.
한화 약 34조 원.
스무 살 대학생의 눈앞에 — 34조가 떠 있었다.
"I don't……"
연통일의 손이 떨렸다.
주머니 안에서 — 무언가가 뜨거워졌다.
아버지가 건넨 만년필. "이것도 가져가"라고 했던 검은 만년필. '眞實' 두 글자가 새겨진 만년필.
뜨거웠다.
맥박처럼 — 뛰고 있었다.
연통일이 만년필을 꺼냈다. 금빛이 — 번졌다.
켈러의 눈이 커졌다.
"That pen……"
켈러가 말했다.
"Your great-great-grandfather had the same pen. In 1919. When he sat in this very room."
111년 전, 같은 방.
같은 만년필.
같은 성(姓).
연통일의 눈에서 — 눈물이 흘렀다.
왜 우는지 몰랐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버지가 아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 만년필이 뜨거웠고, 눈물이 나왔다.
111년의 무게가 — 스무 살의 어깨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hr>
1919년 9월.
뉴욕.
연재희가 취리히행을 결심한 달.
밀정의 그림자가 —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