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2 태평양을 건너
Ch.2 태평양을 건너 — Part 5 — 부치지 못하는 편지
Part 5 — 금문 (항해 21일차, 1919년 3월 28~29일)
삼월 이십팔일. 스무하루째 날.
새벽.
"보인다!"
소명이 돛대 위에서 소리쳤다.
연재희가 갑판으로 뛰어나왔다. 새벽안개 사이로 — 무언가 보였다.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 것. 산? 구름? 아니다.
땅.
삼 주 만에 본 땅이었다.
"미국이야!"
소명이 돛대 위에서 춤을 추었다. 선원들이 갑판으로 올라와 수평선을 가리켰다. 중국어로 소리쳤다. "도착이다! 도착이다!"
연재희가 뱃머리에 섰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 안개 뒤로 — 산의 윤곽이 드러났다. 초록빛 언덕. 그 아래 항구. 그리고 항구 너머로 — 도시.
샌프란시스코.
연재희의 심장이 뛰었다. 스물하루 동안 바다 위에 있었다. 폭풍을 만났다. 죽을 뻔했다. 수첩에 편지를 쓰고, 소명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진 선주에게 바다를 배웠다. 그 스물하루가 —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재희 선생."
진 선주가 다가왔다.
"도착이오."
"감사합니다. 진 선주."
"감사는 필요 없소. 하지만 — 한 가지."
진 선주가 표정을 굳혔다.
"입국이 문제요."
"입국?"
"미국은 아시아인 입국을 제한하고 있소. 1882년 중국인 배제법이 있고, 조선인도…… 쉽지 않소."
"어떻게 하면 됩니까?"
"Angel Island."
진 선주가 항구 왼편을 가리켰다. 작은 섬이 보였다. 나무가 울창한 섬.
"저곳이 이민국 심사소요. 아시아에서 온 사람은 전부 저기서 심사를 받소. 빨리 되면 이틀, 늦으면 석 달. 어떤 사람은 — 돌려보내지기도 하오."
연재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돌려보내지면……"
"왔던 배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지."
스물하루를 건너와서 — 돌아가다니.
"방법이 없습니까?"
진 선주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한 가지 있소. 내 선원이라고 하면 — 선원 신분으로 상륙 허가를 받을 수 있소. 다만 사흘 이내에 배로 돌아와야 하는 조건이 붙소."
"사흘?"
"사흘 안에 한인 사회와 접촉해서 후원자를 찾으면 — 그 후원자가 보증인이 되어 체류 연장을 신청할 수 있소."
"사흘……"
또 사흘이었다. 조선을 떠날 때도 사흘이었다. 운명은 이 사내에게 언제나 사흘의 시간을 주었다.
"하겠습니다."
"좋소."
<hr>
오전 열 시.
봉황호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입항했다.
부두가 가까워질수록, 도시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높은 건물. 자동차. 전차. 가로등. 경성과는 다른 세계였다. 거리에 사람들이 걸어다녔다. 양복을 입은 백인 남자, 드레스를 입은 여자,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가…… 미국이구나."
연재희가 중얼거렸다.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나라.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나라.
그러나 — 부두에 내리자마자, 현실이 다가왔다.
"Hey! You! Chinese?"
이민국 직원이 연재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뚱뚱한 백인 남자. 콧수염을 기른 사내.
진 선주가 나섰다.
"He's my crew. Korean. Not Chinese."
"Korean? Same thing. Papers?"
진 선주가 서류를 내밀었다. 봉황호 선원 명단. 연재희의 이름이 중국식으로 적혀 있었다. '연재희(延在熙)' — 한자 이름이 중국인인지 조선인인지 미국인은 구분하지 못했다.
직원이 서류를 훑어보았다. 도장을 찍었다.
"Three days. Back to the ship in three days or you're deported."
사흘.
연재희가 부두에 발을 디뎠다.
미국 땅.
딱딱한 콘크리트. 경성의 흙길과는 다른, 단단하고 차가운 땅. 스물하루 동안 흔들리는 갑판 위에 있다가 딱딱한 땅을 밟으니 — 다리가 흔들렸다. 육지멀미라고 해야 할까. 세상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소명이 배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잘 가!"
연재희가 손을 흔들었다.
"소명아! 고맙다!"
"한글 잊지 않을게!"
"잊지 마라!"
"만세!"
소명이 외쳤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중국 소년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두의 미국인 몇 명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 연재희가 미소 지었다.
"만세."
작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앞에 — 샌프란시스코가 펼쳐져 있었다.
사흘.
이 도시에서 한인 사회를 찾아야 한다.
교회를 찾아야 한다.
보증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 살 수 있다.
<hr>
연재희가 부두에서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주소가 있었다. 장윤보의 소개장에 적힌 주소 —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1026 Powell Street'.
길을 물어야 했다.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거리의 행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주소가 적힌 종이.
"Excuse me……"
연재희의 영어는 그 두 단어가 전부였다.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최운학과 달리, 연재희는 한학과 서학을 배웠지 영어는 배우지 못했다.
행인이 종이를 보고, 고개를 흔들며 가버렸다.
두 번째 행인. 역시 무시.
세 번째 행인. "I don't know" 하고 가버렸다.
네 번째 행인 — 중국인이었다. 차이나타운 방향에서 오는 중년 남자.
연재희가 중국어로 말했다. 소명에게 배운 서투른 중국어.
"칭원…… 워 야오 취 저거 디팡(请问,我要去这个地方)."
중국인이 종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Powell Street. 이쪽으로 가면 있어."
중국어로 길을 알려주었다. 연재희가 길을 따라 걸었다.
언덕이 많은 도시. 숨이 찼다. 경성은 평지였는데, 샌프란시스코는 산이었다.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막을 내리고.
마흔 분을 걸었다.
간판이 보였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大韓人國民會 總會館)'.
한글이었다.
태평양을 건너 처음 본 한글.
연재희의 눈에 물이 찼다.
문을 밀었다.
안에 한인 서너 명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연재희가 한국어로 말했다.
"조선에서 왔습니다."
방 안이 술렁였다.
"조선에서?"
"삼월 초하루 — 만세를 부르고 왔습니다."
침묵.
그리고 한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눈이 빨개진 사내.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
"만세…… 소식은 들었소. 전보로. 하지만 직접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연재희입니다."
"어떻게 오셨소?"
"화물선을 타고 왔습니다. 스물하루 동안."
방 안의 사내들이 연재희를 둘러쌌다. 스물하루 동안 바다 위에 있던 사내. 경성에서 만세를 부르고 온 사내. 소금에 절은 옷,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 야윈 몸 — 그러나 타오르는 눈.
"앉으시오. 밥부터 먹으시오."
"밥보다……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오?"
"황사용 목사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 사흘 안에 보증인을 구해야 합니다."
"사흘?"
"사흘 안에 보증인이 없으면 — 배에 실려 돌아갑니다."
방 안이 다시 술렁였다.
"걱정 마시오."
양복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여기가 대한인국민회요. 우리가 보증인을 서겠소."
연재희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주저앉았다. 마흔 분 걸은 다리가, 스물하루 배 위에 있던 다리가, 경성에서 인천까지 걸은 다리가 — 한꺼번에 풀렸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중에. 밥부터 먹으시오."
하얀 쌀밥이 나왔다. 된장국이 나왔다. 김치가 나왔다.
태평양을 건너 처음 먹는 조선의 밥.
연재희가 첫 숟가락을 떴다.
울었다.
밥이 짠 것이 아니었다. 눈물이 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