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2 태평양을 건너

Ch.2 태평양을 건너 — Part 4 — 왕펑

Part 4 — 부칠 수 없는 편지 (항해 16~18일차, 1919년 3월 23~25일)

삼월 이십삼일. 열여섯째 날.

맑음. 바람 보통.

폭풍이 지나간 뒤, 연재희는 매일 편지를 썼다. 부칠 수 없는 편지. 바다 한가운데에 우체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썼다.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정순에게.

삼월 이십삼일.

여기는 태평양 한가운데요. 사방이 물이오. 하늘과 물밖에 없소.

당신이 보고 싶소.

어제 폭풍이 있었소. 배가 뒤집어질 뻔했소. 죽을 뻔했소. 그런데 — 죽을 뻔한 순간에 보인 것이 당신 얼굴이었소.

웃기지 않소? 나라를 되찾겠다고 바다를 건너면서, 죽을 뻔한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당신이었소.

당신이 보내준 머리카락을 품에 안고 있소. 동백기름 냄새가 아직 남아 있소. 이 냄새가 사라지기 전에 — 돌아가겠소.

대한이는 잘 있소? 젖은 잘 먹소? 밤에 울지는 않소?

나는 괜찮소. 걱정 마시오.

(거짓말이오. 괜찮지 않소.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소.)

당신의 남편 재희.

연재희가 편지를 접었다. 봉투에 넣을 수 없었다. 봉투가 없었으니까. 수첩 사이에 끼워두었다.

내일도 쓸 것이다.
모레도.
부칠 수 없어도.
<hr>
삼월 이십사일. 열일곱째 날.

흐림. 바람 약함.

두 번째 편지.

내 아들 대한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아버지는 아마 많이 늙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지금 태평양 위에 있다.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중이다. 왜 가느냐고? 돈을 모으러 간다. 무슨 돈? 나라를 되찾을 돈이다.

너는 아마 물을 것이다. 나라가 뭐냐고. 왜 되찾아야 하냐고. 지금 사는 곳이 나라가 아니냐고.

대한아. 나라는 — 집이다.

우리 종로 뒷골목 한옥이 네 집이듯, 조선이 우리 모두의 집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집에 들어와서 "이 집은 내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 밥을 먹고, 우리 방에서 자고, 우리한테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을 되찾으러 간다. 멀리. 아주 멀리.

미안하다, 대한아.
아버지가 곁에 없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 네 이름을 기억해라.

대한.

너는 이 나라의 이름을 가진 아이다.
이 나라가 자유로워지는 날, 네 이름이 그 증거가 된다.

아버지가.

연재희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왜 곁에 없는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세상에 태어난 지 스물여드레밖에 안 된 아이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 — 식민지 아버지의 운명이었다.
<hr>
같은 날 밤.

갑판 위.

보름달이 떠 있었다. 태평양 위의 보름달. 달빛이 바다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배가 은빛 길 위를 나아가는 것 같았다.

연재희가 세 번째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동지들에게.

백경수에게.
경수, 잘 있느냐. 나는 태평양 위에 있다. 폭풍을 만나 죽을 뻔했다. 살았다.
부탁이 있다. 정순이 기침을 하고 있다. 광제가 돌보겠다고 했지만, 너도 가끔 들러다오. 정순은 강한 여자지만,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외롭다.
내 카메라 — 아, 너한테는 카메라가 있지. 내 것을 빌릴 필요도 없겠구나.
대한이를 찍어다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아이가 크는 것을 기록해다오. 내가 돌아갔을 때 그 사진을 보고 싶다.
살아서 만나자.
재희.

조봉출에게.
봉출, 첫 송금은 도착하는 대로 하겠다. 상하이 경유, 네 무역 루트로 보낸다.
장윤보가 자세한 것을 알려줄 것이다.
시장은 다시 세웠느냐? 불탄 자리에 다시 세웠겠지. 네가 그런 사내니까.
건강해라.
재희.

이상덕에게.
상덕, 만주에 갔느냐? 아직이면 서둘러라.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무모하게 죽지 마라.
살아서 싸워라. 살아서 이겨라.
죽은 영웅보다 산 전사가 필요하다.
재희.

서광제에게.
광제, 정순을 부탁한다.
기침이…… 심해지면 연락을 해다오. 어떻게든. 장윤보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라도.
살아서 고맙다고 하겠다.
재희.

최운학에게.
운학, 야학은 시작했느냐?
대한이가 글 읽을 나이가 되면, 부탁한다.
한글을 가르쳐다오. 그리고 — 아버지가 왜 떠났는지, 이야기해다오.
미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미친 사내가 나라를 되찾겠다고 바다를 건넜다고.
재희.

연재희가 편지 다섯 통을 수첩 사이에 끼워넣었다. 부칠 수 없는 편지 일곱 통. 정순에게 하나, 대한에게 하나, 동지 다섯에게 다섯.

바다가 이 편지들을 전해줄 수 있다면 — 파도에 실어 보낼 텐데.
<hr>
삼월 이십오일. 열여덟째 날.

맑음. 바람 보통.

사흘 뒤면 도착한다.

연재희가 장윤보의 소개장 세 통을 다시 꺼냈다.

첫째. 안창호 선생 앞.

'도산 선생께. 경성에서 연재희라는 사내를 보냅니다. 3.1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자이며, 미주 동포 모금을 위해 태평양을 건넌 자입니다. 믿을 만한 사내입니다. 부디 인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경성 장윤보 올림.'

둘째. 박용만 앞.

'용만 형께. 하와이 한인 사회에 소개할 사람이 있소. 연재희. 양반가 출신이나 책상에 앉아 있는 자가 아니오. 3.1운동 때 피를 흘렸고, 자금을 모으겠다고 배를 탔소. 농장 한인들에게 소개해주시오. 장윤보.'

셋째. 황사용 목사 앞.

'황 목사님께. 주 안에서 인사드립니다. 조선에서 연재희라는 형제를 보냅니다. 3.1운동의 소식을 직접 전해줄 것입니다. 미주 한인 교회 네트워크에 연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성 장윤보.'

세 통의 편지. 세 개의 문.

안창호 — 지식인과 유학생의 문.
박용만 — 노동자와 농부의 문.
황사용 — 교인과 교민의 문.

이 세 개의 문을 열면 — 미주 한인 팔천 명에게 닿을 수 있었다.

연재희가 소개장을 다시 봉투에 넣으며 전략을 짰다.

미주 전략 초안.

1단계: 샌프란시스코 (2주)
– 황사용 목사를 통해 교회 네트워크 진입
– 3.1운동 현장 증언 → 동포 사회 결집
– 첫 모금

2단계: 로스앤젤레스 (2주)
– 안창호 선생과 흥사단 접촉
– 지식인/유학생 네트워크 확보
– 독립신문 미주판 발행 기반 마련

3단계: 하와이 (1개월)
– 박용만과 한인 노동자 사회 접촉
– 사탕수수 농장 순회 모금
– 가장 큰 동포 집단 (7,000명)

4단계: 동부 (시카고, 뉴욕, 워싱턴) (1~2개월)
– 미국 정부 및 언론 접촉
–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호소
– 국제 여론 환기

연재희가 수첩을 덮었다.

사흘.

사흘 뒤면 미국 땅을 밟는다.

이천만 달러의 여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