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2 태평양을 건너
Ch.2 태평양을 건너 — Part 1 — 출항
Part 1 — 일기 (항해 3~7일차, 1919년 3월 10~14일)
삼월 십일. 셋째 날.
흐림. 파도 보통. 뱃멀미 계속.
오늘도 토했다. 먹은 것이 없는데 토할 것이 나온다. 위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다. 서광제가 준 약을 먹었지만 듣지 않는다.
쌀 가마니 사이에 누워 천장을 본다. 선체의 나무판 사이로 바닷물이 스며든다. 똑. 똑. 똑. 이마 위에 짠물이 떨어진다.
정순의 얼굴이 보인다. 천장의 나무결 무늬가 — 아내의 얼굴 같다.
미쳤구나, 연재희.
<hr>
수첩의 글씨는 여기서 끊겼다.
다음 날.
삼월 십일. 넷째 날.
맑음. 바람 약함.
진소명이 죽을 가져왔다. 쌀죽에 생강을 넣은 것이다. 뱃멀미에 좋다고 했다. 먹었다. 위장이 가라앉았다.
소명이 물었다. "아저씨, 글자 가르쳐줘."
"무슨 글자?"
"조선 글자. 아저씨가 수첩에 쓰는 그 글자."
이 열여섯 살 중국 소년이 —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갑판에 올라가 나란히 앉았다. 바다 바람이 불었다. 나무 갑판 위에 물을 적셔서 글자를 썼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이것이 자음이다."
소명이 따라 썼다. 손가락으로 갑판 위에.
"ㄱ…… ㄴ…… 어렵다!"
"어렵지 않다. 세종대왕이라는 분이,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글자다."
"왕이 만들었어?"
"그래."
"우리 황제는 글자 안 만들었는데."
소명이 혀를 찼다.
"좋은 왕이었나봐."
"좋은 왕이었지."
바람이 갑판 위의 글자를 말렸다. 물이 마르면 글자가 사라졌다. 그러면 다시 적었다. 쓰고, 마르고, 다시 쓰고.
한글은 — 물 위에 쓰면 사라지지만, 머릿속에 쓰면 영원히 남는 글자였다.
<hr>
삼월 십이일. 다섯째 날.
맑음. 바람 보통. 뱃멀미 조금 나아졌다.
오늘 진소명에게 모음을 가르쳤다.
ㅏ ㅓ ㅗ ㅜ ㅡ ㅣ
소명이 글자를 조합하기 시작했다.
"바…… 다?"
"그래. 바다."
"바다! 나도 쓸 수 있어!"
소명이 갑판 위에 큰 글씨로 적었다.
바 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네."
소명이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 경성에 두고 온 대한이가 커서 웃을 모습 같았다. 연재희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소명에게 한 가지 더 가르쳤다.
"만세."
"만세? 무슨 뜻이야?"
"영원히 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가 독립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명이 갑판에 적었다.
만 세
"중국어로는 완쑤이(萬歲)야. 뜻이 같아."
"같구나."
"조선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나라 잃은 마음은 같아."
열여섯 살 소년의 말에 스물일곱 살 사내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소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hr>
삼월 십삼일. 여섯째 날.
비. 바람 강함. 파도 높음.
갑판에 올라갈 수 없었다. 화물칸에 갇혀 하루를 보냈다.
수첩을 펼쳤다. 쓸 것이 많았다.
오늘은 쓸 수 없다.
손이 떨린다.
추워서가 아니다.
보고 싶어서다.
정순. 대한. 경성. 종로. 한옥. 서까래. 등잔불.
보고 싶다.
이 바다가 육지였으면 걸어서 돌아갈 텐데.
이 바다가 강이었으면 헤엄쳐서 건너갈 텐데.
태평양은 너무 넓다.
그리움을 담기에는.
수첩에 얼룩이 졌다. 연재희는 비가 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hr>
삼월 십사일. 일곱째 날.
맑음. 바람 약함. 파도 잔잔함.
일주일.
조선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상하이에서 출항한 지 사흘. 봉황호는 동중국해를 벗어나 태평양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수평선이 달라졌다. 동중국해의 탁한 회색이 아니라, 태평양의 깊은 남색. 물빛만으로 바다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 선주가 갑판에서 나침반을 읽고 있었다.
"연 선생."
"네."
"오늘부터 열흘 동안은 — 땅이 보이지 않소."
연재희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물. 하늘과 물의 경계만 있고, 땅은 없었다.
"무섭소?"
"……무섭습니다."
"그래야 정상이오.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내는 바다를 모르는 사내요."
진 선주가 키를 잡으며 말했다.
"내가 삼십 년을 바다 위에서 살았소. 삼십 년 동안 매일 무서웠소. 하지만 무서우면서도 — 갔소."
"왜요?"
"바다 건너에 뭔가가 있으니까."
진 선주가 웃었다. 주름투성이 얼굴. 소금에 절은 얼굴. 태풍을 수십 번 만난 얼굴. 그러나 눈은 — 소년처럼 밝았다.
"연 선생도 바다 건너에 뭔가가 있어서 가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그것이 뭐요?"
연재희가 잠시 생각했다.
"돈입니다."
"돈?"
"나라를 되찾을 돈입니다."
진 선주가 한참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를 되찾는 데 돈이 필요한 줄은…… 나도 알고 있소. 중국도 마찬가지니까."
진 선주가 키를 돌리며 덧붙였다.
"바다는 나라가 없소. 바다 위에서는 조선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 다 같은 사람이오. 파도 앞에서는 황제도 거지도 같소."
"그래서 바다가 좋은 겁니까?"
"그래서 바다가 공평한 것이지."
연재희가 수첩을 꺼내 적었다.
바다는 공평하다.
파도 앞에서는 황제도 거지도 같다.
— 진 선주의 말.
진실도 그래야 한다.
진실 앞에서는 제국도 식민지도 같아야 한다.
일주일째.
아직 열네 날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