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1 만세의 날

Ch.1 만세의 날 — 프롤로그 — 만년필

프롤로그 — 1919년 2월 28일 밤, 경성

바람이 차가웠다.

음력 정월 스무여드렛날, 경성의 밤은 짐승의 등처럼 검었다. 종로 뒷골목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일본 헌병의 군화 소리가 먼 골목에서 돌바닥을 때렸다. 쩍. 쩍. 쩍. 그 소리가 멀어질 때마다 골목의 그림자들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연재희는 등잔불 앞에 앉아 있었다.

스물일곱. 충청도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나 한학과 서학을 두루 섭렵한 사내. 그러나 아홉 해 전 나라를 잃은 뒤로는, 그 모든 학문이 허사였음을 뼈저리게 알았다. 경술년의 치욕. 그날 아버지 연치원이 사랑채에서 통곡하던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돌았다.

"재희야."

정순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문지방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만삭의 배가 저고리 밑으로 둥글게 솟아 있었다. 스물넷, 혼인한 지 겨우 일 년. 시집온 뒤로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건만, 이 여인은 한 번도 한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들어와 누우시오."

"당신이 먼저 누우셔야지."

정순이 웃었다. 배가 너무 불러 웃음이 찡그림처럼 보였다.

"아이가 발길질을 해요. 잠이 안 와요."

연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의 팔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음력 정월의 한기가 한옥의 벽을 뚫고 들어와 있었다.

"내일이오."

"……네."

"내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오."

정순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남편이 밤마다 뒷방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을. 인쇄 냄새가 배인 종이 뭉치가 광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일, 이 사람이 목숨을 걸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살아서 돌아오셔야 해요."

"……"

"이 아이 아비 없이는 못 키워요."

연재희가 아내의 배에 손을 얹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뜨거웠다. 이 차가운 밤에, 그 작은 생명만이 뜨거웠다.

"내일이 삼월 초하루요."

"알아요."

"이 아이가 내일 나오면 좋겠소."

정순이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연재희가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노란 불꽃이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불꽃만 홀로 흔들렸다.

"만세 소리를 들으며 태어나면…… 이 아이는 평생 만세를 기억할 것이오."

정순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손이었다. 결의에 찬 손이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약속하셔야 해요."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다.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내일, 경성의 하늘 아래서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 이 아이에게 물려줄 나라가 없다는 것.

등잔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정순의 숨소리만 들렸다. 곧 잠이 들었다. 만삭의 여인은 쉬이 잠들고 쉬이 깬다.

연재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뒷방 광에 숨겨둔 태극기 서른일곱 장. 손목시계는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세 시간 후면, 경성의 하늘이 뒤집어진다.

그는 아내의 배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움직임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기다려라."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네 아비가 너에게 줄 것이 있다. 나라를."
<hr>
밤이 깊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개가 또 짖었다. 헌병의 군화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경성의 이월 마지막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내일,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일, 한 아이가 이 세상에 올지.
내일, 111년의 시계가 째깍거리기 시작할지.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