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9
Part 9 — 금고의 무게 (1920년 4월~5월)
4월.
서대문형무소의 봄.
환기구로 보이는 하늘이 — 맑아졌다. 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 환기구를 통해 독방 안으로 떨어졌다.
연재희가 벚꽃잎을 주웠다.
분홍빛.
정순이 좋아하던 색.
연재희가 벚꽃잎을 만년필 옆에 놓았다.
고문으로 부러진 왼손은 — 간수가 응급 처치를 해주었다. 나무 부목으로 고정. 제대로 된 치료는 아니었지만 — 뼈가 붙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 글을 쓸 수 있었다.
연재희가 수인복의 안쪽 — 솔기 사이에 숨겨둔 종이를 꺼냈다. 간수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찢어온 화장지. 거칠고 누런 종이.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잉크가 — 아직 남아 있었다. 3.1운동 날 받은 이후 수백 페이지를 적었지만, 잉크가 마르지 않았다. 보통 만년필이 아니라는 것을 — 연재희는 알고 있었다.
사월.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 봄.
벚꽃이 환기구로 들어왔다.
정순은 — 소식이 없다.
대한이는 — 소식이 없다.
장윤보 형은 — 같은 형무소에 있다고 들었다. 제5동.
면회가 허용되지 않는다.
왼손이 아직 아프다. 부목을 했지만 — 제대로 붙을지 모르겠다.
스위스는 — 안전할 것이다. 봉기가 지키고 있으니까.
이정숙이 25만 달러를 무사히 전달했는지 — 알 수 없다.
10년.
3,600일쯤 남았다.
하루에 한 일:
밥 먹기. 운동(30분). 잠자기.
그리고 — 버티기.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
<hr>
5월.
첫 번째 면회가 허용되었다.
정순이 왔다.
면회실. 나무 칸막이. 작은 창.
창 너머로 — 정순의 얼굴이 보였다.
"재희 씨."
"정순아."
두 사람이 — 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았다.
정순이 — 더 마르고 창백해져 있었다.
"기침은?"
"괜찮아요." 정순이 웃었다. "당신 걱정이나 하세요."
"대한이는?"
"잘 자라고 있어요. 뛰어다녀요. 조만석 아저씨네 시장에서 — 사과를 훔쳐 먹고 다녀요."
연재희가 — 웃었다. 처음으로.
형무소에 들어온 뒤 — 처음 웃었다.
"말은?"
"'엄마' 하고 '아' 하고 — 두 단어예요."
"'아'?"
"'아빠'의 '아'인 것 같아요."
연재희의 눈에서 — 눈물이 흘렀다.
대한이가 '아'라고 했다. 아버지의 '아'.
이 아이가 — '아빠'라고 부를 때까지. 아버지가 나갈 때까지.
10년.
"정순아."
"네."
"열쇠는 — 잘 가지고 있소?"
정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 있어요."
"잘 지켜주시오."
"지킬게요."
면회 시간 10분.
간수가 말했다.
"시간 끝."
"재희 씨!"
정순이 칸막이에 손을 대었다.
연재희가 — 반대편에서 손을 대었다.
나무판 사이로 — 손끝이 닿지 않았다.
"살아 있으세요."
정순이 말했다.
"살아 있겠소."
"약속."
"약속."
정순이 — 돌아갔다.
면회실 문이 닫혔다.
연재희가 —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참 동안 — 앉아 있었다.
간수가 끌어냈다.
<hr>
독방으로 돌아온 연재희가 — 종이에 적었다.
오월. 면회.
정순이 왔다.
대한이가 뛰어다닌다고 했다.
사과를 훔쳐 먹는다고 했다.
정순의 기침이 — 더 심해진 것 같다.
얼굴이 더 마르고 창백하다.
나는 —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0년 동안 — 아무것도.
열쇠는 정순이 가지고 있다.
만년필은 내가 가지고 있다.
두 개의 진실이 — 나뉘어 있다.
언젠가 — 다시 합쳐질 것이다.
그날까지 — 버틴다.
연재희가 종이를 접어 수인복 안쪽에 숨겼다.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환기구로 — 하늘이 보였다.
파란 하늘.
같은 하늘 아래 — 정순이 기침을 하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 대한이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 장윤보가 같은 형무소의 다른 방에 갇혀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 진봉기가 취리히에서 금고를 지키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 한상철이 종로에서 잡화를 팔고 있었다. 500엔을 세며.
같은 하늘 아래 — 쿠로카와가 다음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hr>
그리고 — 상하이.
5월 중순.
이정숙이 조봉출에게 전달한 25만 달러가 — 금으로 변환되어 화물선에 실렸다.
목포 루트.
목포에서 상하이로 온 밀수선이 — 금괴를 싣고 다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마르세유행 화물선으로 갈아실었다.
$250,000 상당의 금.
약 900온스.
마르세유까지 30일.
이 금이 취리히에 도착하면 — UBS 계좌의 잔고는 $282,800.
아직 — 2,000만 달러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러나 — 10가문의 자산 현금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경성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목포로, 목포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마르세유에서 취리히로.
연재희가 만든 루트.
연재희가 열어놓은 길.
연재희는 — 감옥에 갇혔지만.
길은 — 열려 있었다.
금은 — 흐르고 있었다.
스위스를 향해.
<hr>
서대문형무소 독방.
밤.
연재희가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만년필을 가슴 위에 놓았다.
만년필이 — 따뜻했다.
심장 박동에 맞춰 — 미세하게 떨렸다.
연재희가 눈을 감았다.
111년.
그 중 — 첫 번째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소리. 대한이의 울음소리. 만년필의 금빛.
그로부터 — 1년 2개월.
연재희는 감옥에 있었다.
정순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 금고는 열려 있었다.
스위스의 금고.
111년의 금고.
연재희가 독방의 어둠 속에서 — 중얼거렸다.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
만년필이 — 금빛으로 빛났다.
독방의 어둠을 — 한 줌의 금빛이 밝혔다.
연재희가 — 그 빛을 보며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취리히의 꿈.
리마트 강. UBS 45번지. 뮐러 박사의 미소.
그리고 — 누군가.
자신이 아닌 — 다른 남자가 UBS에 들어가는 꿈.
젊은 남자. 스무 살쯤. 연재희를 닮은 — 그러나 다른 사람.
"Mr. Yeon?"
뮐러가 아닌 — 다른 은행가가 묻는다.
"Yes. Tong-il Yeon."
통일.
연통일.
꿈속에서 — 연재희는 보았다.
5세대 뒤의 후손이 — 금고를 열고 — 울고 있는 것을.
만년필의 비전.
아직 — 완전한 비전은 아니었다. 조각. 파편. 그러나 — 미래의 한 조각.
연재희가 꿈에서 — 울었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 알 수 없었다.
<hr>
서대문형무소의 밤은 — 길었다.
3,600일의 밤.
그러나 — 밤은 반드시 끝났다.
아침이 오면 — 환기구로 햇살이 들어왔다.
매일 아침.
10년 동안.
연재희는 — 그 햇살을 보며 버텼다.
만년필의 '眞實'을 만지며 버텼다.
진실은 — 반드시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