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6

Part 6 — 체포 (1920년 3월 10일~15일, 경성)

3월 10일. 성북동.

연재희가 — 결심했다.

정순을 만나야 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정숙이 목포로 25만 달러를 가져간 뒤, 연재희는 — 경성을 떠나야 했다. 만주로. 또는 상하이로. 수배 중인 몸으로 경성에 머무는 것은 —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 전에 — 아내를 한 번만.

최동진이 말렸다.

"재희 씨, 장 사장 집에는 — 감시가 붙어 있을 것이오."

"알고 있소."

"그래도 가겠소?"

"가야 하오."

"……그러면, 내가 길을 만들겠소."

최동진이 조만석에게 연락했다.

조만석이 — 다시 10가문의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3월 12일. 밤 열한 시.

연재희가 장윤보의 집에 도착했다.

성북동에서 종로까지 — 뒷골목으로, 골목에서 골목으로, 어둠 속을 걸었다. 조만석의 시장 사람들이 길을 안내했다. 경찰의 야간 순찰 시간을 피해 — 빈틈을 찾아.

장윤보의 집 뒷문.

문이 열렸다.

정순이 서 있었다.

"재희 씨."

"정순아."

연재희가 — 아내를 안았다.

정순의 몸이 — 더 마르고 가벼워져 있었다. 2주 전보다도.

"기침은?"

"……조금."

거짓말이었다. 서광제가 최동진을 통해 전해준 말: '정순 씨의 폐가 — 오른쪽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한이가 자고 있었다. 열두 달. 이불을 걷어차고 — 대(大)자로 자고 있었다.

연재희가 아이 옆에 앉았다.

작은 얼굴. 연재희의 눈매와 정순의 입 모양.

"예쁘게 자라고 있소."

"네."

"걷는 것을 — 볼 수 없어서 미안하오."

"돌잔치에서 봤잖아요."

"그때 한 번뿐이었소."

연재희가 아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정순아."

"네."

"나는 — 내일 경성을 떠나야 하오."

정순이 — 멈췄다.

"또…… 가시는 거예요?"

"수배 중이오. 경찰이 찾고 있소. 여기 있으면 — 장 형 집까지 위험해지오."

"어디로?"

"만주. 아니면 — 상하이."

"언제 돌아와요?"

연재희가 — 대답하지 못했다.

정순이 연재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돌아…… 올 수 있는 거예요?"

"돌아오겠소."

"약속했잖아요. 인천 가기 전에."

"알고 있소."

"재희 씨." 정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 괜찮아요. 기침이 좀 심하지만 — 괜찮아요. 그런데 — 대한이가. 대한이한테 아버지가 필요해요."

"알고 있소."

"알고 있으면 — 왜 자꾸 가시는 거예요?"

정순의 목소리가 — 떨렸다.

처음이었다.

정순이 연재희에게 화를 낸 것은.

"재희 씨가 나라를 사랑하는 거 — 알아요. 진실이 이긴다는 거 — 알아요. 그런데…… 그런데 대한이한테도 아버지가 진실이에요. 내 옆에 있어주는 것도 — 진실이에요."

연재희가 아무 말도 못 했다.

정순이 옳았다.

나라를 위한 진실과, 가족을 위한 진실.

두 진실 사이에서 — 연재희는 어느 쪽도 온전히 지킬 수 없었다.

"정순아."

"……네."

"미안하오."

"미안하지 마세요."

정순이 눈물을 닦았다.

"미안하지 말고 — 살아 돌아와요. 그것만 하면 돼요."

연재희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찬 손. 마른 손. 기침에 시달리는 몸의 손.

"정순아, 이것을 —"

연재희가 품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UBS 금고 42번의 열쇠.

"이것은?"

"중요한 열쇠요. 내가 만약 — 돌아오지 못하면. 이것을 대한이에게 전해주시오."

"대한이한테?"

"대한이가 스무 살이 되면 — 이 열쇠를 주시오. 그리고 '취리히'라고만 말해주시오."

"취리히?"

"그것만 알면 — 대한이가 나머지를 알아낼 것이오."

정순이 열쇠를 받았다.

작은 열쇠. 금색. UBS 문장이 새겨진.

"재희 씨…… 이게 뭔지는 안 물어볼게요."

"고맙소."

"비밀인 거죠?"

"비밀이오."

"알겠어요."

정순이 열쇠를 품에 넣었다.

연재희가 만년필을 꺼냈다.

"이것도 — 대한이에게 전해주시오. 만약 내가."

"만년필은…… 안 돼요."

정순이 고개를 저었다.

"만년필은 — 재희 씨가 가지고 있어야 해요. 재희 씨의 무기잖아요."

연재희가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眞實'.

"……알겠소."

만년필은 가져가겠다.

열쇠는 정순에게.

만년필은 자신에게.

두 개의 '진실'이 — 나뉘었다.
<hr>
3월 13일. 새벽.

연재희가 장윤보의 집을 나섰다.

정순이 문 앞까지 나왔다. 대한이를 안고.

대한이가 — 잠에서 깨어 연재희를 보았다.

이번에는 — 울지 않았다.

작은 손을 뻗었다.

아버지를 향해.

연재희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대한아."

아이가 웃었다.

"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말을 못 하니까. 그러나 — '아'라고 했다.

아버지의 '아'일 수도 있었다.

연재희가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 돌아섰다.

골목으로 걸어갔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 갈 수 없으니까.

그러나 — 20발짝 걸은 뒤, 연재희는 멈추고 말았다.

돌아보았다.

정순이 — 문 앞에 서 있었다.

대한이를 안고. 새벽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기침을 참으며.

연재희의 눈에서 — 눈물이 흘렀다.

'이것이 —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정순의 폐가 — 무너지고 있었다. 1년. 길면 2년.

다시 올 수 있을까. 경찰에게 잡히지 않고, 고문당하지 않고, 살아서 — 다시 이 문 앞에 설 수 있을까.

연재희가 —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 다시 걸었다.

골목의 어둠 속으로.

정순이 문 앞에서 — 오래 서 있었다.

아이를 안고.

새벽 바람에 — 기침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기침에서 — 손수건에 빨간 것이 묻었다.

정순이 손수건을 접었다.

"대한아."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큰일을 하러 가신 거야."

대한이가 정순의 볼을 만졌다.

젖은 볼을.
<hr>
3월 15일. 경성.

연재희가 — 잡혔다.

성북동을 떠나 경성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만주행 기차를 타려고 — 새벽에 역으로 갔다.

경성역 앞.

검문.

3월 들어 검문이 강화되어 있었다. 장윤보 체포 이후 — 경찰이 종로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고, 경성역과 용산역에 수배 인물 사진이 배포되어 있었다.

연재희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이정수'.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 개찰구를 지나려 했다.

"신분증."

일본 경찰이 손을 내밀었다.

연재희가 — 가짜 신분증을 건넸다. 최동진이 마련해준 위조 서류.

경찰이 서류를 봤다.

'이정수. 충청도 대전 출신. 만주 봉천행.'

경찰이 고개를 들었다.

연재희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 옆에 있는 게시판을 보았다.

수배 사진.

연재희의 사진.

백경수의 사진관에서 찍힌 그 사진. 한상철이 복사해서 헌병대에 건넨 그 사진.

경찰의 눈이 — 사진과 연재희의 얼굴 사이를 오갔다.

1초.

2초.

"잠깐만."

경찰이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이——!

연재희가 몸을 돌렸다.

달리려 했다.

그러나 — 뒤에서 또 다른 경찰이 팔을 잡았다.

"움직이지 마!"

연재희가 버둥거렸다.

만년필이 — 품속에서 떨어지려 했다.

연재희가 품을 움켜쥐었다. 만년필만은.

경찰 세 명이 달려왔다.

연재희가 땅에 쓰러졌다.

무릎에 짓밟혔다.

수갑이 채워졌다.

"이름?"

"이정수."

"거짓말. 너 — 연재희지?"

연재희가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이 연재희의 품을 뒤졌다.

만년필.

경찰이 만년필을 꺼냈다.

"이게 뭐야?"

"……내 만년필이오."

"'眞實'이라고 새겨져 있네. 진실? 무슨 만년필에 진실이야."

경찰이 만년필을 들어보았다.

그 순간 — 만년필이 붉게 빛났다.

경찰이 놀라 만년필을 떨어뜨렸다.

"뭐야, 이거!"

만년필이 — 바닥에 떨어졌다.

경성역 광장의 돌바닥 위에.

금이 갔다.

아니 — 금이 가지 않았다. 만년필은 튼튼했다. 111년을 견딜 만년필.

그러나 — 연재희의 마음에 금이 갔다.

만년필을 떨어뜨렸다.

'眞實'을 떨어뜨렸다.

경찰이 만년필을 주워 — 주머니에 넣었다.

"증거물이야."

"아니오! 그건 — 내 만년필이오!"

"시끄러!"

연재희가 끌려갔다.

경성역 앞 광장에서 — 헌병대 차량으로.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의 경성 시민들. 조선인. 일본인.

아무도 — 나서지 않았다.

1920년의 경성.

독립운동가가 끌려가는 것을 — 모두가 알았지만 — 아무도 막지 못했다.

연재희가 차에 실렸다.

차가 움직였다.

종로를 지났다.

조만석의 시장을 지났다.

백경수의 사진관을 지났다.

장윤보의 무역상을 지났다. 문이 닫혀 있었다.

한상철의 잡화상을 지났다. 문이 열려 있었다.

한상철이 — 문 앞에 서 있었다.

연재희와 한상철의 눈이 — 마주쳤다.

차 안에서 — 수갑을 찬 연재희.

문 앞에서 — 잡화를 정리하는 한상철.

1초.

한상철이 — 고개를 돌렸다.

연재희가 — 한상철의 얼굴을 기억했다.

장윤보가 말한 이름. 종로의 쥐. 한상철.

이 남자의 정보 때문에 — 인천에서 습격당했고, 장윤보가 잡혔고, 지금 자신이 끌려가고 있었다.

연재희가 — 한상철의 얼굴을 기억에 새겼다.

잊지 않겠다.

차가 종로를 지나 — 서대문 방향으로 향했다.

서대문형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