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Part 2
Part 2 — 자금 총괄 (1920년 2월 13일~25일, 경성)
2월 13일. 장윤보의 집.
아침.
정순이 대한이를 데리고 서광제의 병원으로 갔다. 진찰을 받기 위해. 조만석이 호위했다.
연재희와 장윤보가 — 단둘이 남았다.
장윤보가 서류를 펼쳤다.
"재희, 지금 상황을 정리하겠다."
장윤보의 서류. 10가문의 자금 현황.
■ 자금 현황 (1920년 2월 기준)
1. UBS 취리히 계좌 개설 완료 (CH-0042-1919-1101)
– 초기 예치금: $2,800
– Dynasty Account 설정 완료
– 진봉기 현지 관리 중
2. 1차 금괴 운송 (상하이→마르세유)
– 동방호, 12월 1일 출항
– $30,000 상당 금괴 12개
– 마르세유 도착 추정: 1월 중순 (확인 대기)
3. 10가문 자산 현금화 진행 중
– 완료: 이상덕 $150,000 / 송학주 $100,000 / 한예린 $250,000
– 진행 중: 조만석 $500,000 / 백경수 $300,000 / 서광제 $350,000
– 미착수: 최동진 $200,000 / 윤달성 $400,000
– 장윤보: $2,500,000 (부분 진행)
– 연재희 미주 모금: $12,847
4. 현금화 완료 자금: 약 $500,000 (경성 내 분산 보관)
5. 상하이 루트: 조봉출 관리, 이정숙 지원
– 미행 감시 계속됨 (모리 타케시)
– 2차 운송 준비 중 ($100,000 상당)
"50만 달러가 경성에 있소."
장윤보가 말했다.
"이 돈을 — 인천항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야 하오."
연재희가 숫자를 보았다.
50만 달러.
2,000만 달러의 2.5%.
"부족하오."
"알고 있소. 그래서 — 전국 순회 모금을 해야 하오."
장윤보가 이미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개성의 삼 부호, 평양의 이 부호, 함흥의 김 부호 — 이 사람들에게 자금을 요청할 것이오. 10가문 외에 — 뜻이 있는 부호들."
"위험하지 않소? 밀정이 돌아다니는데."
"한상철." 장윤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놈이 — 내 무역상에 납품을 시작했소."
"납품?"
"잡화 납품. 포장재, 끈 같은 것.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 창고를 드나들고 있소."
"쫓아내시오."
"쫓아내면 — 의심을 사오. 밀정은 쫓아내는 것보다 — 이용하는 것이 낫소."
장윤보가 미소를 지었다. 40년 장사꾼의 미소.
"한상철에게 — 가짜 정보를 흘려보겠소."
"가짜?"
"한상철이 창고에서 볼 수 있게 — 가짜 서류를 놓아두겠소. 자금이 만주로 간다는 서류. 봉천(심양)의 은행으로."
"만주?"
"일본이 만주 쪽을 추적하는 동안 — 진짜 자금은 상하이로 보내는 것이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보 형, 대단하오."
"대단한 게 아니라 — 40년 장사꾼의 잔머리요."
<hr>
2월 15일.
장윤보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무역상 1층 창고에 — 가짜 서류가 놓였다.
봉투. 겉면에 '봉천(奉天) 만주은행'이라고 적힌 서류. 안에는 가짜 송금 의뢰서. $500,000을 만주 봉천의 은행으로 보내겠다는 내용.
물론 — 전부 가짜였다.
한상철이 납품을 하러 창고에 들어왔다.
포장재 상자를 내려놓으며 — 눈이 창고 구석의 책상으로 갔다.
봉투.
봉천.
만주은행.
한상철의 눈이 — 빛났다.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한상철이 봉투를 열었다. 3초 동안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 봉투를 원래 위치에 놓았다.
창고를 나서며 — 한상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주.
자금이 만주로 간다.
이것을 쿠로카와에게 보고하면 —
보고서 M-112-0042
장윤보 무역상 창고에서 발견.
만주 봉천 만주은행 앞 송금 의뢰서.
추정 금액: $500,000.
10가문 자금이 만주로 이동 중인 것으로 판단됨.
M-112.
한상철이 보고서를 헌병대에 전달했다.
쿠로카와가 읽었다.
"만주?"
쿠로카와의 눈이 좁아졌다.
"스위스가 아니라 — 만주?"
3초.
5초.
쿠로카와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미끼다."
한상철이 눈을 깜빡였다.
"미끼요?"
"장윤보가 — 일부러 보여준 거다."
"어떻게 아십니까?"
"만주 봉천 만주은행 — 이건 일본 자본 은행이야. 독립자금을 일본 자본 은행에 넣는 바보가 어디 있어?"
한상철의 얼굴이 — 굳어졌다.
속았다.
장윤보에게 속았다.
쿠로카와가 한상철을 바라보았다. 실망의 눈.
"상철. 장윤보를 얕보지 마라. 그 남자는 — 40년 장사꾼이야. 너 같은 애송이가 당해낼 수준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됐고 —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쿠로카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직접 움직이겠다."
<hr>
2월 18일.
쿠로카와 겐조가 — 직접 경성 시내를 돌기 시작했다.
사복.
군복이 아닌 — 조선인 양복 차림. 중절모. 쿠로카와는 조선어가 유창했기 때문에 — 잠깐의 대화로는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종로를 걸었다.
조만석의 시장을 지나갔다.
백경수의 사진관을 지나갔다.
장윤보의 무역상을 지나갔다.
그리고 — 연재희의 집 앞.
연재희의 집. 작은 한옥. 지금은 비어 있었다. 정순과 대한이가 장윤보의 집으로 옮겨간 뒤.
쿠로카와가 집 앞에 섰다.
아무도 없었다.
"돌아왔을 텐데."
쿠로카와가 혼잣말을 했다.
"2월이면 — 돌아올 시간이다."
쿠로카와가 종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거리 어딘가에 — 연재희가 있었다. 숨어 있었다.
"어디서 숨고 있는 거냐, 연재희."
쿠로카와의 눈이 종로를 훑었다.
국밥집. 이발소. 전당포. 잡화상.
사진관.
쿠로카와가 — 백경수의 사진관에 들어갔다.
"사진 한 장 찍으러 왔소."
백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쿠로카와가 의자에 앉았다. 사진관 안을 둘러보았다.
벽의 사진들. 경성의 풍경. 인물 사진.
10가문의 단체 사진은 — 이미 떼어놓은 뒤였다. 장윤보가 지시한 것이다.
"이 사진관이 오래됐소?"
쿠로카와가 물었다. 조선어로.
"10년 됐지요."
"경성 사진은 잘 찍으시오?"
"뭐, 이 동네 사진이야 많이 찍었지요."
"혹시 — 이 분 아시오?"
쿠로카와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연재희의 사진.
한상철이 이 사진관에서 몰래 복사한 그 사진.
백경수의 심장이 — 멈췄다.
자신이 찍은 사진.
연재희의 사진.
그 사진이 — 이 낯선 남자의 손에.
"모르는 분이네요."
백경수가 태연하게 말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 얼굴은 평온했다.
"그래요? 이 근처 분 같은데."
"경성에 사람이 많으니까요. 다 알 수는 없지요."
쿠로카와가 백경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3초.
백경수는 —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의심받으니까.
"그렇겠지요."
쿠로카와가 사진을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사진은 — 다음에 찍으러 오겠소."
"네, 언제든 오십시오."
쿠로카와가 사진관을 나섰다.
문 밖에서 — 쿠로카와가 멈췄다.
"거짓말."
쿠로카와가 중얼거렸다.
"저 남자는 — 알고 있다. 연재희를."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사진을 보면 — 관심 없이 힐끗 보고 만다. 저 남자는 — 사진을 정면으로 봤다. 2초 이상. 아는 사람의 사진이니까."
쿠로카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진관 주인. 백경수.
이 남자를 — 압박하면 실마리가 풀릴 수 있었다.
그러나 —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실을 하나하나 잡아당겨야 했다. 한꺼번에 끊으면 — 다른 실이 도망간다.
쿠로카와가 종로를 떠났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 그물을 좁히고 있었다.
<hr>
2월 20일. 인천항.
한상철이 박재길을 미행하고 있었다.
만주은행 건으로 쿠로카와에게 깨진 뒤 — 한상철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장윤보를 직접 추적하는 것은 — 위험했다. 장윤보가 가짜 정보를 흘릴 정도라면 — 이미 한상철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 박재길로 돌아갔다.
인천항의 토지 중개인. 장윤보의 물류 거점.
한상철이 인천항 부두 근처의 찻집에 앉아 — 박재길의 사무소를 지켜보았다.
오전 10시. 박재길이 사무소를 나섰다. 부두 쪽으로 걸어갔다.
부두에서 —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화물선. 일본 국적.
박재길이 화물선의 선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한상철이 너무 멀어서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 박재길의 손에 봉투가 있었다. 선장에게 건네는 봉투.
봉투 안에 — 돈? 서류?
화물선이 어디로 가는 배인지 —
한상철이 항구의 운항표를 확인했다.
그 배. '오사카마루(大阪丸)'. 목적지: 상하이.
상하이행 화물선.
박재길이 상하이행 배의 선장에게 봉투를 건넸다.
한상철의 손이 떨렸다.
자금 운송.
인천항에서 상하이로 — 화물선에 돈(또는 금)을 실어 보내는 루트.
이것이 — 진짜 루트였다.
만주가 아니라 — 상하이.
한상철이 수첩에 적었다.
박재길 → 오사카마루 선장 → 상하이.
봉투 전달 확인.
추정: 자금 또는 자금 운송 지시서.
자금 루트: 경성 → 인천항 → 상하이 (확정)
최종 목적지: 스위스 (추정, 쿠로카와 대위 판단 기준)
한상철이 찻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 진짜였다.
가짜 만주 정보가 아닌 — 진짜 상하이 루트.
쿠로카와에게 보고하면 —
500엔이 — 눈앞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