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4 스위스의 금고
Ch.4 스위스의 금고 — 프롤로그
프롤로그 — 아버지의 등 (2030년 8월 1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연만세가 아들 연통일과 함께 걷고 있었다.
쉰일곱과 스물. 아버지와 아들. 코리안투데이 편집국장과 서울대 미디어학과 1학년.
8월의 서울은 뜨거웠다.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이 햇빛에 달궈져 있었다. 관광객과 수학여행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 연만세의 걸음은 느렸다.
"아버지, 괜찮아요?"
연통일이 물었다.
연만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았지만.
이 건물 안에서 — 고조할아버지가 10년을 보냈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스물여덟에 들어가서 서른여덟에 나왔다. 청춘의 전부를 이 붉은 벽돌 안에서 보냈다. 아내 정순이 폐결핵으로 죽을 때도 이 안에 있었다. 아들 대한이 세 살, 다섯 살, 열 살이 될 때도 — 이 안에 있었다.
연만세가 전시실에 들어갔다.
벽에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일제강점기 수감자들의 사진.
그 중 — 하나.
연재희.
수감 번호 제4271호.
깎은 머리. 수인복. 그러나 — 눈이 살아 있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눈. 꺾이지 않은 눈.
연통일이 사진 앞에 섰다.
"이 사람이……?"
"네 고조할아버지다."
연만세가 말했다.
연통일이 사진을 바라보았다.
"눈이…… 무섭다."
"무서운 게 아니라 — 단단한 거다."
연만세가 사진 밑의 설명을 읽었다.
延在熙 (1892~1934)
독립운동가. 1920년 3월 체포.
서대문형무소 수감 (1920~1930).
불법 해외 도항, 독립자금 모금 혐의.
1934년 3월 1일 순국.
"10년."
연만세가 말했다.
"10년 동안 이 안에 있었다. 스물여덟에 들어가서 서른여덟에 나왔다."
"왜…… 그렇게 오래?"
"자백하지 않았으니까."
연만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본이 원한 건 — 계좌번호였다. 스위스 은행 계좌. 독립자금이 어디 있는지. 그것만 말하면 — 풀어주겠다고 했다."
"……"
"10년 동안. 고문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10년 동안 — 한마디도 안 했다."
연통일이 사진을 다시 보았다.
이 눈. 이 단단한 눈.
10년의 고문을 견딘 눈.
"아버지."
"응."
"내일이 — 8월 15일이잖아요."
"그래."
"내일 — 뭔가 있는 거죠?"
연만세가 아들을 바라보았다.
스무 살.
아버지가 아들에게 비밀을 전하는 나이.
About Time.
"통일아."
"네."
"내일 — 모든 걸 말해줄게."
연만세가 아들의 어깨를 잡았다.
"그 전에 — 이곳을 봐야 했어. 네 고조할아버지가 10년을 보낸 곳을. 네가 알아야 하니까. 이 비밀이 — 얼마나 무거운지."
연통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쉰일곱 살의 손. 34조를 지키며 전세 아파트에서 산 손.
연만세가 전시실을 나섰다.
형무소 마당을 걸었다. 통일이 뒤따랐다.
마당 한가운데 —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100년 넘은 나무. 일제강점기에도 여기 있었던 나무. 수감자들이 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 하늘을 보았다.
연재희도 — 이 나무를 보았을 것이다.
연만세가 나무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 만년필을 꺼냈다.
'眞實' 두 글자.
만년필이 — 따뜻해졌다.
여기를 기억하는 것처럼.
100년 전, 이 만년필의 주인이 10년을 보낸 곳.
<hr>
1920년 1월.
연재희가 — 경성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
밀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헌병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쿠로카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 정순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