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에필로그
에필로그 — 금고 42번 (2030년 9월 3일)
취리히. UBS 본점. 7층 회의실.
연통일이 —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260억 달러.
스무 살 대학생 앞에 떠 있는 숫자.
프리드리히 켈러 시니어 디렉터가 조용히 기다렸다.
연통일이 눈물을 닦았다. 소매로.
"I'm sorry. I don't…… I don't understand what's happening."
"Take your time, Mr. Yeon."
연통일이 심호흡을 했다.
"My father…… he never told me about this."
"That was the condition, Mr. Yeon. This account has been passed down through five generations. Each generation's guardian knew, but they could never tell the next generation until the right moment."
다섯 세대.
연재희 → 연대한 → 연독립 → 연만세 → 연통일.
"Your father, Mr. Man-se Yeon, has been the fourth guardian. He's managed this account since 1993."
1993년. 아버지가 스무 살이었을 때.
연통일이 아버지를 떠올렸다. 코리안투데이 편집국장. 전세 아파트. 낡은 자동차. 영숙 할머니의 장례 때 — 장례비가 부족해서 숙부에게 돈을 빌렸던 일.
34조 원이 있으면서.
34조 원이 있으면서 — 장례비를 빌렸다.
연통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 슬픔이 아니라 분노.
아니, 분노도 아니었다.
경외.
아버지가 지켜온 비밀. 할아버지가 지켜온 비밀. 증조할아버지가 지켜온 비밀. 고조할아버지가 — 111년 전 이 방에서 시작한 비밀.
"Mr. Yeon, there's one more thing."
켈러가 일어섰다. 회의실 뒤쪽의 문을 열었다.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로.
지하 금고.
UBS의 지하 금고는 — 스위스 알프스 아래로 파고 들어간 것처럼 깊었다. 콘크리트 벽. 철문. 보안 카메라.
켈러가 카드를 찍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홍채 인식을 하고 — 문이 열렸다.
금고실.
양쪽 벽에 금고 문이 줄지어 있었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1번. 2번. 3번.
……
42번.
켈러가 42번 금고 앞에 섰다.
"This safe deposit box was assigned to your great-great-grandfather on December 15, 1919."
1919년 12월 15일.
연재희가 취리히를 떠나기 전날.
켈러가 연통일에게 열쇠를 건넸다.
"Your father gave you this key."
아버지가 인천공항에서 건넨 봉투 — 그 안에 열쇠도 있었다. 종이와 함께.
연통일이 열쇠를 받았다. 손이 떨렸다.
열쇠를 금고에 넣었다.
돌렸다.
금고 문이 — 열렸다.
안에 —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 수첩.
낡은 가죽 수첩. 100년 이상 된 것. 표지가 바래고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그러나 — 보존 상태가 좋았다. 금고의 항온항습 덕분에.
연재희의 수첩.
태평양 위에서 일기를 쓴 수첩. 대서양에서 쓴 수첩. 취리히에서 쓴 수첩.
111년의 기록.
연통일이 수첩을 들었다. 무겁지 않았다. 100그램도 안 되는 작은 수첩. 그러나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수첩.
둘. 손수건.
흰 면 손수건. 가장자리에 — 빨간 자수.
'眞實'
정순의 손수건.
연재희가 취리히를 떠나기 전, 장윤보를 통해 전달받은 손수건. 아내가 수놓은 '眞實'.
연재희는 이것을 금고에 넣었다. 경성으로 가져가면 — 일본 경찰에게 빼앗길 수 있으니까.
금고에 넣었다.
111년 동안.
아내의 손수건이 — 111년 동안 스위스 금고에서 기다렸다.
연통일이 손수건을 들었다.
빨간 실의 '眞實'이 — 아직 선명했다.
"……할머니의 할머니."
연통일이 말했다.
정순. 1895년생. 1922년 폐결핵으로 사망. 스물일곱.
대한이가 세 살 때 죽은 어머니.
연재희가 옥중에서 소식을 들은 아내.
이 손수건을 수놓을 때 — 정순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편이 지구 반대편에서 나라를 위해 뛰고 있을 때 — 기침을 하며 바늘을 잡고 — '眞實' 두 글자를 수놓았을 때.
연통일의 손에서 — 만년필이 다시 뜨거워졌다.
금빛.
이번에는 — 금고 전체가 빛났다.
수첩이 빛났다. 손수건이 빛났다. 만년필이 빛났다.
금빛이 — 연통일의 얼굴을 비추었다.
눈물이 금빛에 반사되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연통일이 수첩을 가슴에 안았다.
"할머니의 할머니."
손수건을 가슴에 안았다.
"다섯 세대."
111년.
만년필의 '眞實' 두 글자가 — 금고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진실.
진실은 — 111년을 기다릴 수 있었다.
<hr>
연통일이 금고실을 나섰다.
켈러가 말했다.
"Mr. Yeon. Your father left a message for you."
"A message?"
"He called last week. He said — when your son opens the vault, tell him this."
켈러가 종이를 건넸다.
연통일이 읽었다.
아버지의 글씨.
통일아.
이제 — 네 차례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었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었고,
아버지가 이었다.
이제 — 네가 끝낸다.
2030년 8월 15일.
그날에 — 모든 것이 세상에 나온다.
만년필을 잘 지켜라.
수첩을 읽어라.
그리고 — 손수건을 기억해라.
너의 증조할머니 정순은 —
진실을 수놓은 여자였다.
아버지 만세.
연통일이 편지를 접었다.
취리히의 하늘이 — 맑았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111년 전, 연재희가 이 도시를 떠날 때도 —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 맑다.
연통일이 반호프슈트라세를 걸어 내려갔다.
수첩을 품에 안고.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만년필을 — 가슴 주머니에 꽂고.
111년의 세 번째 페이지가 — 넘어갔다.
247페이지가 남았다.
<hr>
그리고 — 191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대서양 한가운데.
연재희가 — 경성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수첩에 적었다.
십이월 이십오일. 대서양.
돌아간다.
금고를 열었다. 열쇠를 남겼다. 봉기가 지키고 있다.
이제 — 돌아가서 돈을 모아야 한다.
10가문의 재산을 현금화하고,
금으로 바꾸고,
바다를 건너 스위스까지.
밀정이 기다리고 있다.
헌병대가 기다리고 있다.
쿠로카와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 정순도 기다리고 있다.
대한이도 기다리고 있다.
두려움과 그리움 사이에서 — 배가 흔들린다.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
이겨야 한다.
이길 것이다.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대서양의 파도가 배를 흔들었다.
연재희가 창밖을 보았다.
바다.
태평양보다 검고, 태평양보다 차가운 바다.
그 바다 건너, 태평양 건너, 경성에서 —
밀정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 Ch.3 「밀정의 그림자」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