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Part 9

Part 9 — 12월, 밀정의 그림자 (1919년 12월, 경성/상하이/취리히)

1919년 12월 1일. 상하이. 황푸강 부두.

장윤보의 무역선 '동방호(東方號)'가 마르세유를 향해 출항했다.

300톤급 화물선. 중국산 비단, 도자기, 차(茶)를 실었다. 그리고 — 도자기 상자 세 개 밑에 — 금괴 열두 개가 숨겨져 있었다.

$30,000 상당의 금.

조봉출이 이정숙의 도움으로 변환한 금. $10,000에 이어 추가 자금을 더 변환한 것이었다. 경성에서 장윤보가 인천항을 통해 보낸 현금이 상하이에 도착하여 — 금으로 바뀐 것이다.

$30,000은 — 2,000만 달러의 0.15%에 불과했다.

그러나 — 첫 발이었다.

조봉출이 부두에서 배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상하이의 겨울비. 차갑고 진했다.

"봉출 씨."

이정숙이 옆에 서 있었다.

"출항했습니다."

"마르세유까지 30일…… 1월 초에 도착하겠지요."

"네."

"두 번째 배는?"

"1월 중순 출항. 이번에는 $100,000 상당의 금을."

$100,000. 열 배.

10가문의 자산 현금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 금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었다.

"문제는……"

조봉출이 뒤를 돌아보았다.

부두에서 100미터쯤 뒤에 —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모리.

미행자.

"아직 따라다니고 있군요."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부두까지 따라온 것은 — 우리가 배를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봉출의 얼굴이 굳어졌다.

"배의 목적지를 아는 건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무역선이니까 — 여러 항구에 들르겠지요. 마르세유가 최종 목적지라는 것까지는 — 아직 모를 겁니다."

"아직."

그 '아직'이 — 문제였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 그물이 조여지고 있었다.

"다음 배는 — 루트를 바꿔야 합니다."

이정숙이 말했다.

"상하이에서 직접 마르세유가 아니라 —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 콜롬보, 수에즈…… 우회 루트."

"시간이 더 걸리겠지요."

"그래도 안전합니다."

조봉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재희 씨에게 전갈을 보내겠소. '다리가 흔들리지만 건너고 있다'고."
<hr>
12월 5일. 경성 종로.

한상철이 — 마침내 장윤보에게 접근했다.

방법은 단순했다.

장윤보의 무역상에 잡화를 납품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무역상에는 포장재, 끈, 왁스, 인주 등 잡화가 필요했다. 한상철은 이미 종로의 여러 상점에 납품하고 있었으니 — 자연스러운 거래 제안이었다.

"장 사장님, 제가 싸게 드리겠습니다."

한상철이 무역상 1층 창고에서 장윤보에게 말했다.

장윤보가 한상철을 바라보았다.

마흔여섯의 눈. 40년간 종로에서 장사한 눈. 사람을 읽는 눈.

"상철이, 갑자기 왜?"

"요새 장사가 안 돼서요. 거래처를 좀 넓혀보려고."

"그래? 얼마에?"

"시장 가격보다 2할 싸게."

장윤보가 생각했다.

한상철. 종로의 착한 상인. 외상도 잘 주고, 사람들한테 인심도 좋고.

"……좋아, 우선 포장재부터 좀 가져와 봐."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상철이 환하게 웃었다.

납품을 시작하면 — 무역상 1층 창고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출입하면서 — 무역상의 물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어떤 화물이 들어오고, 어떤 화물이 나가는지. 인천항으로 보내는 짐이 무엇인지.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상철이 무역상을 나서며 — 뒤를 돌아보았다.

장윤보가 — 한상철을 보고 있었다.

한상철이 사라진 뒤에도.

장윤보의 눈이 — 한상철의 등을 쫓고 있었다.
<hr>
그 밤. 장윤보의 집.

장윤보가 아내에게 말했다.

"한상철이라는 놈이 — 냄새가 나."

"잡화상? 착한 애잖아."

"착해서 문제야. 너무 착해."

장윤보가 차를 마셨다. 쓴 차.

"종로에서 40년을 살면 —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어. 한상철이 그 놈…… 웃을 때 눈이 안 웃어."

"설마……"

"아직 모르겠어. 증거가 없으니까. 그런데 — 조심해야 해."

장윤보가 창밖을 보았다. 경성의 밤.

"재희한테 편지를 써야겠어."

장윤보가 종이를 꺼냈다. 붓이 아닌 — 연필로. 연필은 잉크와 달리 불에 태우기 쉬웠다.

재희에게.

쥐가 문 앞까지 왔다.
아직 집 안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 냄새를 맡고 있다.

금고를 서둘러라.
12월이 넘어가면 — 쥐가 집 안까지 들어올 것이다.

윤보.

이 편지는 —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일반 우편은 위험했다. 우체국에 일본 검열관이 있었다. 조선인의 해외 우편은 전수 검열.

장윤보가 진봉기를 떠올렸다.

조카 봉기가 베른에 있었다. 스위스에서 연재희와 함께 있었다.

편지를 — 외교 우편으로 보낼 수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 루트. 프랑스 조계의 우체국을 통해 — 유럽으로.

"봉출이에게 보내야겠어."

장윤보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면에는 — 중국어로 가짜 수신인을 적었다.

"王世夫 先生 — 上海 南京路 12号"

왕시푸. 금은방 주인. 이정숙이 연결해놓은 연락처.

왕시푸가 편지를 받으면 → 이정숙에게 전달 → 이정숙이 프랑스 조계 우체국에서 스위스로 발송.

세 단계의 우회.

밀정의 눈을 피하기 위한 — 세 겹의 거짓말.
<hr>
12월 10일. 취리히.

연재희가 장윤보의 편지를 받았다.

쥐가 문 앞까지 왔다.

연재희의 손이 — 떨렸다.

밀정. 한상철. 10가문의 문 앞까지 왔다.

"봉기 씨."

연재희가 진봉기를 불렀다.

"네."

"경성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소."

"삼촌의 편지요?"

연재희가 편지를 보여주었다.

진봉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쥐가 문 앞까지…… 그러면 — 시간이 없다는 뜻이군요."

"그렇소."

연재희가 창밖을 보았다. 취리히의 12월. 눈이 쌓여 있었다. 리마트 강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봉기 씨, 나는 — 돌아가야 하오."

"돌아가신다고요? 경성으로?"

"첫 번째 금괴 배가 마르세유에 도착하면 — 뮐러 박사가 인수할 것이오. 나는 — 경성으로 돌아가서 나머지 자금 이동을 총괄해야 하오."

"위험합니다."

"위험하지 않으면 — 독립운동이 아니오."

진봉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연재희 씨, 한 가지만 물어도 됩니까?"

"뭐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연재희가 진봉기를 바라보았다.

스물넷의 청년. 장윤보의 조카. 유학생. 아직 — 감옥에 가본 적 없고, 고문당한 적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 없는 청년.

"봉기 씨."

"네."

"내 아들 대한이가 — 올해 3월 1일에 태어났소."

"3.1운동 날이요?"

"그날 — 만세 소리 속에서 태어났소. 그리고 그날 — 이 만년필을 받았소."

연재희가 만년필을 꺼냈다. '眞實' 두 글자.

"이 만년필이 — 뭔지 아직 모르겠소. 빛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뜨거워지기도 하오. 보통 만년필은 아닌 것 같소."

"……그것이 이유입니까?"

"아니오. 이유는 — 대한이오."

연재희의 눈이 — 젖었다.

"내 아들이 나라가 있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오. 만세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일본어를 강제로 배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 한글로 이름을 쓸 수 있는 세상."

"……"

"그 세상이 — 내 살아생전에 올지는 모르겠소. 안 올 수도 있소. 그래서 — 돈을 지키는 것이오. 돈이 있으면 — 언젠가 올 그 날에,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연재희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111년이 걸리더라도."

진봉기가 — 울었다.

스물넷 청년이, 호텔 방에서, 눈물을 흘렸다.

"연재희 씨…… 저도 — 돕겠습니다."

"이미 돕고 있지 않소."

"아니, 더. 제가 — 취리히에 남아서 UBS 계좌를 관리하겠습니다. 연재희 씨가 경성으로 돌아가시면 — 여기서 뮐러 박사와 연락하며, 금괴 인수를 총괄하겠습니다."

"봉기 씨……"

"삼촌도 동의하실 겁니다."

연재희가 진봉기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두 사람이 악수했다.

취리히의 밤.

눈이 —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hr>
12월 15일. 취리히.

연재희가 뮐러 이사에게 인사를 갔다.

"뮐러 박사, 저는 — 경성으로 돌아갑니다."

뮐러가 놀라지 않았다.

"알고 있었습니다, Mr. Yeon. 당신은 — 여기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

"진봉기 씨가 여기 남아서 계좌를 관리할 것입니다."

"Mr. Jin. 좋은 청년이더군요."

뮐러가 서랍에서 — 봉투를 꺼냈다.

"이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봉투 안에 — 열쇠 하나.

"이 열쇠는?"

"UBS 금고 42번. 당신의 개인 금고입니다."

"개인 금고?"

"계좌와 별도로 — 물리적으로 보관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쓰십시오. 서류든, 귀중품이든."

연재희가 열쇠를 받았다.

금고 42번.

"고맙습니다, 뮐러 박사."

"Mr. Yeon."

뮐러가 연재희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돌아가면 —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은행은 —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계좌를 지키겠습니다. 100년이든, 111년이든."

연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올 수 있을지 — 모르겠습니다."

"오지 못하면 — 당신의 아들이 올 것입니다. 그 아들의 아들이 올 것입니다."

"네."

"그것이 — 왕조 계좌(Dynasty Account)의 의미입니다."

연재희가 UBS를 나섰다.

반호프슈트라세의 눈.

취리히의 마지막 밤.

내일이면 — 파리로. 파리에서 리버풀로. 리버풀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태평양을 건너 — 경성으로.

왔던 길을 — 거꾸로.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 올 때보다 위험했다.

밀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쿠로카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 정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hr>
12월 20일. 경성 종로 헌병대.

쿠로카와 겐조가 전보를 받았다.

베른 공사관으로부터.

極秘
宛先: 黒川源三 大尉
発信: 駐瑞西(スイス)伯恩公使館

延在熙ト推定サルル人物、取利比(チューリヒ)出発ヲ確認。
方向: パリ経由、帰路ト推定。

尚、UBS銀行ニ口座開設ノ事実ヲ確認セリ。
口座番号及ビ金額ハ不明。

쿠로카와가 전보를 내려놓았다.

"돌아오고 있군."

연재희가 취리히를 떠났다. 경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UBS 계좌 개설 확인."

쿠로카와의 얼굴에 —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스위스 은행에 계좌를 열었다. 해냈다. 조선인 청년 하나가 —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스위스 은행에 계좌를 열었다.

존경.

그리고 — 분노.

"이미 금고를 열었어. 이제 금고에 돈이 차는 것만 막으면 된다."

쿠로카와가 지도를 보았다.

"연재희의 귀국 루트…… 파리, 리버풀, 뉴욕, 태평양."

"귀국까지 — 2개월은 걸리겠군."

"2월. 1920년 2월쯤 경성에 도착한다."

쿠로카와가 메모를 적었다.

1920년 2~3월.
연재희 귀국 추정 시기.

체포 시점: 귀국 직후.
장소: 인천항 또는 경성 시내.

체포 근거:
– 불법 해외 도항
– 독립운동 자금 모금
– 제국 안보 위협

목표: 연재희로부터 UBS 계좌 정보 획득.
계좌번호, 접근 조건, 위임자 정보.

수단: 취조. 필요시 — 고문.

쿠로카와가 메모를 읽었다.

고문.

그 단어에서 — 쿠로카와의 손이 잠깐 멈췄다.

쿠로카와는 다른 일본 장교들과 달리 — 고문을 즐기지 않았다. 정보 추출의 수단으로 인정했을 뿐,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 2,000만 달러.

이 돈이 스위스에 묻히면 — 조선 독립운동은 100년간 자금을 보장받는다.

일본 제국의 안보 문제.

고문이 필요하다면 — 할 것이다.

쿠로카와가 메모를 봉투에 넣었다.

"상철."

한상철을 불렀다.

"대위님."

"연재희가 돌아오고 있다."

한상철의 눈이 — 빛났다.

"돌아온다고요?"

"2월쯤. 인천항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인천항이면 — 박재길의 영역이군요."

"그렇다. 박재길과 연결된 모든 움직임을 감시해라. 연재희가 도착하는 순간 — 우리가 잡는다."

"알겠습니다."

한상철이 나갔다.

종로 거리를 걸었다.

12월의 경성. 바람이 차가웠다. 솜옷을 입고도 뼈가 시렸다.

한상철이 —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겨울 하늘.

"연재희……"

한상철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자.

사진으로만 본 남자.

그 남자를 — 팔아넘기려 하고 있었다.

500엔.

일본 국적.

그 대가로.

한상철의 발이 — 잠깐 멈췄다.

종로 국밥집 앞.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따뜻한 국밥 냄새. 조선의 겨울 냄새.

한상철이 — 국밥을 한 그릇 시켰다.

뜨거운 국물을 마셨다.

눈물이 — 나올 뻔했다.

왜 눈물이 나는지 — 한상철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하면.

잠을 못 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