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Part 8
Part 8 — 그물 (1919년 11월~12월, 경성/상하이/취리히)
1919년 11월 15일. 경성 종로 헌병대.
쿠로카와 겐조가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한상철의 보고서.
세 장짜리.
보고서 M-112-0031
1. 장윤보, 10월 말~11월 초 경성 출입 빈번해짐.
무역상 2층에서 야간 모임 개최 (추정: 10가문 모임).
참석자: 확인된 9명 + 여성 1명 (정순, 연재희의 처로 추정).
2. 조만석, 시장 내 부동산 일부 매각 시도 중.
김복동 증언: "조 사장이 뒷산 땅을 판다고 하더라."
3. 이상덕, 논 200석지기 중 100석지기 매각 중개인에 의뢰.
중개인 이름: 박재길 (인천항 거주).
4. 종합: 10가문이 재산을 현금화하고 있음.
자금 규모: 추정 불가하나, 대규모로 판단됨.
자금 행선지: 미확인.
쿠로카와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재산을 현금화."
10가문이 재산을 팔고 있다. 토지, 건물, 상권. 한꺼번에.
이것은 — 투자가 아니었다. 야반도주(夜半逃走)도 아니었다.
이것은 — 전쟁 자금의 준비였다.
"박재길."
쿠로카와가 그 이름에 밑줄을 그었다.
인천항 거주. 토지 매각 중개인.
그리고 — 장윤보가 인천항에 사람을 자주 보낸다는 보고.
인천항이 자금 이동의 거점이다.
"상철."
쿠로카와가 한상철을 불렀다.
한상철이 들어왔다.
"박재길이라는 남자를 조사해라."
"인천항의요?"
"토지 중개인인데 — 단순한 중개인이 아닐 수 있다. 장윤보와 어떤 관계인지, 인천항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쿠로카와가 서랍에서 서류를 꺼냈다.
"도쿄에서 회신이 왔다."
도쿄 참모본부.
"특별 작전이 승인되었다. 독립자금 추적 전담반. 코드명 — '금맥(金脈)'."
"금맥?"
"독립자금의 흐름을 추적하여 원천을 차단한다는 뜻이다. 경성, 상하이, 도쿄, 베른 — 4개 거점에 팀이 배치된다."
한상철이 눈을 깜빡였다.
4개 도시에 걸친 작전. 자신이 알던 규모가 아니었다.
"상철. 네가 — 경성 팀의 핵심이다."
"저요?"
"네가 10가문에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
쿠로카와가 한상철을 바라보았다.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면 — 약속대로다. 일본 국적. 공무원 대우."
"……알겠습니다."
한상철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복도를 걸으며 — 한상철은 생각했다.
4개 도시.
경성. 상하이. 도쿄. 베른.
일본 제국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2,000만 달러의 독립자금을 — 반드시 차단하겠다는 의지.
한상철은 — 그 기계의 톱니바퀴였다.
작지만 — 없어서는 안 되는 톱니바퀴.
종로의 쥐.
쥐는 — 골목을 잘 알았다. 그리고 골목의 사람들을 — 잘 알았다.
한상철이 종로 시장으로 향했다.
박재길.
이 이름을 추적하면 — 자금의 행선지가 드러날 것이다.
<hr>
11월 20일. 인천항.
한상철이 인천에 왔다.
잡화상 물건을 납품한다는 핑계로 — 인천항의 소매상 몇 곳을 돌았다. 그 사이에 — 박재길의 사무소를 확인했다.
인천항 부두 근처. '박재길 부동산'이라는 작은 사무소.
한상철이 사무소 앞을 지나가며 — 안을 훔쳐보았다.
사무소 안에 —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박재길. 오십대. 건장한 체구. 해양인 특유의 검게 탄 얼굴.
그리고 — 다른 남자.
한상철이 멈췄다.
그 남자는 — 중국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 얼굴이 조선인이었다.
누구인가.
한상철이 기억을 더듬었다.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장윤보의 무역상에서 — 몇 달 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
상하이에서 온 사람.
'상하이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더라' — 김복동이 술자리에서 한 말.
이 남자가 — 상하이에서 온 사람?
한상철이 사무소를 지나쳐 걸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100미터 뒤, 골목 안에서 — 수첩을 꺼내 적었다.
인천항 박재길 사무소.
미확인 남자 1명.
조선인. 중국 옷 착용. 상하이에서 온 인물로 추정.
키 중간. 마른 체구. 30대 후반.
이 남자가 자금 운반책이라면 —
한상철의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 흥분 때문이었다.
500엔.
체포로 이어지면 500엔.
한상철이 수첩을 접었다.
그리고 — 상하이에서 온 그 남자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hr>
그 남자는 — 조봉출의 부하, 김태수였다.
서른둘. 상하이에서 5년째 거주. 조봉출의 무역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 이번에 경성에 온 것은 — 장윤보와 박재길에게 금 운송 일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김태수는 — 밀정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경성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장윤보가 지켜주는 도시. 10가문이 있는 도시.
그러나 — 종로의 쥐가 이미 냄새를 맡았다.
11월 22일. 인천항에서 경성으로 돌아가는 기차.
김태수가 기차를 탔다.
한상철도 같은 기차를 탔다. 세 칸 뒤.
경성역에서 내린 김태수가 — 종로 4가로 향했다.
장윤보의 무역상.
한상철이 멀리서 지켜보았다.
김태수가 무역상 건물에 들어갔다. 30분 뒤 나왔다. 그리고 — 역쪽으로 걸어갔다.
한상철은 따라가지 않았다.
충분했다.
인천항의 박재길 → 장윤보의 무역상 → 상하이에서 온 남자.
루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고서 M-112-0037
1. 인천항 박재길 = 자금/물자 이동의 현장 거점.
2. 장윤보 = 경성 총괄.
3. 상하이 연결책 = 미확인 남자 (중국 옷 착용, 조선인).
4. 추정 루트: 경성 → 인천항 → 상하이 → [미확인 최종 목적지].
건의: 인천항 박재길 사무소에 대한 감시 강화.
상하이 공사관에 연결책 인물 정보 공유.
M-112.
한상철이 보고서를 쿠로카와에게 전달했다.
쿠로카와가 읽었다.
그리고 — 미소를 지었다.
"경성 → 인천 → 상하이…… 그리고 상하이 다음은?"
"아직 모릅니다."
"스위스."
쿠로카와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상하이에서 스위스로 가는 해상 루트가 있다. 마르세유 경유. 무역선을 이용하면 — 30일."
"그러면……"
"상하이에서 움직이기 전에 잡아야 한다." 쿠로카와가 지도를 보았다. "상하이 공사관에 전보를 보내겠다. 그 연결책 — 인상착의를 자세히."
한상철이 인상착의를 말했다.
쿠로카와가 적었다.
"좋아, 상철. 잘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 더 — 장윤보를 직접 접근할 수 있겠나?"
한상철이 멈췄다.
장윤보를 — 직접?
"장윤보는…… 조심스러운 분이라."
"알고 있다. 그래서 — 너같은 '착한 상인'이 필요한 거다."
쿠로카와가 웃었다.
"장윤보한테 물건을 납품하는 척 접근해봐. 무역상에 잡화가 필요하잖아."
"……해보겠습니다."
한상철이 나갔다.
장윤보.
10가문의 중심. 연재희의 가장 가까운 동지.
이 남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 위험했다. 장윤보는 한상철같은 소상인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 장윤보 주변의 사람들이 경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 500엔이 눈앞에 있었다.
아니, 500엔이 아니었다.
일본 국적.
한상철이 걸었다.
종로의 거리.
국밥집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발소 주인이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한상철이 — 이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 거리의 사람들.
한상철이 밀정 보고서에 이름을 적을 때마다 — 이 거리의 누군가가 끌려간다.
조만석. 백경수. 장윤보.
이 사람들이 끌려가면 — 이 거리가 죽는다.
한상철은 —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 걸었다.
착한 상철이의 얼굴을 쓰고.
웃으며.
<hr>
11월 25일. 상하이.
쿠로카와의 전보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에 도착했다.
極秘
宛先: 上海総領事館 情報課
発信: 黒川源三 大尉
件名: 朝鮮独立資金 上海経由 輸送ノ件
経城ヨリ仁川港ヲ経テ上海ニ至ル資金輸送ルート確認。
上海側連絡係ノ人相: 朝鮮人、中国服着用、三十代後半、痩身。
推定活動拠点: 仏租界。
監視強化ヲ要請ス。
資金ノ海外流出ヲ阻止セヨ。
黒川源三
상하이 총영사관의 정보과장 야마모토가 전보를 읽었다.
"프랑스 조계의 조선인……"
야마모토가 부하를 불렀다.
"모리."
모리 타케시. 조봉출을 미행하던 그 남자.
"대위."
"프랑스 조계의 조선인을 감시하고 있지?"
"예. 조봉출이라는 남자입니다."
"그 남자 외에 — 또 있나?"
"부하가 한 명. 김태수라는 자입니다. 최근 경성에 다녀온 것으로 파악됩니다."
야마모토의 눈이 빛났다.
"경성. 인천항. 장윤보."
모든 점이 — 이어지고 있었다.
"모리. 감시를 강화해라. 그리고 — 조봉출이 은행이나 금은방에 접근하면 즉시 보고."
"알겠습니다."
모리가 나갔다.
야마모토가 전보를 다시 읽었다.
"스위스…… 2,000만 달러……"
야마모토가 코웃음을 쳤다.
"조선인이 2,000만 달러라니. 말도 안 되지."
그러나 — 쿠로카와 겐조가 직접 전보를 보낸 것이다. 쿠로카와는 헛소리를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야마모토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상하이의 밤.
황푸강의 불빛이 창 너머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물이 — 조여지고 있었다.
<hr>
같은 날. 취리히.
연재희는 — 모르고 있었다.
경성에서, 상하이에서, 도쿄에서 — 그물이 조여지고 있다는 것을.
연재희는 취리히의 호텔 방에서 — 정순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정순아.
취리히에 첫 눈이 내렸소.
하얀 눈이 알프스에서 내려와 도시를 덮고 있소.
이 눈이 경성에도 내리면 좋겠소.
깨끗한 눈이 — 당신의 기침을 멎게 해줄 것 같소.
대한이는 잘 있소?
아홉 달이 되었으니 —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것이오.
첫 걸음은 — 내가 돌아가서 보겠소.
반드시 돌아가겠소, 정순.
12월까지만.
12월에 모든 일이 끝나면 — 돌아가겠소.
재희.
연재희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만년필을 내려놓으려는데 — 만년필이 떨렸다.
미세한 떨림.
붉은빛이 — 아주 희미하게 비쳤다.
경고.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연재희가 만년필을 올려다보았다.
만년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재희의 가슴이 — 답답했다.
호텔 창밖으로 — 취리히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12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쿠로카와가 정한 기한과, 연재희가 정한 기한이 — 같은 12월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12월이 — 분수령이라는 것을.
한쪽은 금고를 채우려 하고.
한쪽은 금고를 부수려 하고.
그리고 — 그 사이에, 종로의 쥐가 둘 모두를 위해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