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3 밀정의 그림자

Ch.3 밀정의 그림자 — Part 4

Part 4 — 경성, 종로의 쥐 (1919년 9월~10월, 경성)

같은 시각.

아니 — 시차를 감안하면 8시간 뒤.

1919년 9월 12일, 아침.

경성 종로.

한상철이 잡화상의 문을 열었다.

'한씨상회(韓氏商會)'

간판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걸려 있었다. 종로 3가 뒷골목, 대로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곳. 양쪽으로 국밥집과 이발소가 있었고, 맞은편에 전당포가 있었다.

한상철. 스물넷.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얼굴이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 이 남자의 가장 큰 재능이었다.

종로 사람들은 한상철을 '착한 상철이'라고 불렀다. 외상을 잘 줬고, 잔돈을 깎지 않았고, 이웃집 어르신에게 김장 배추를 갖다 드렸다. 조만석의 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팔았고, 백경수의 사진관에 인화약품을 납품했다.

10가문의 사람들도 한상철을 알았다. 그러나 — 경계하지는 않았다.

한상철은 10가문이 아니었다. 10가문의 주변인. 종로의 소시민.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 그저 장사꾼.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hr>
한상철이 잡화상 뒷방으로 들어갔다.

뒷방은 좁았다.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비누, 성냥, 양초, 일본산 과자 — 잡화상답게 온갖 물건이 뒤섞여 있었다.

한상철이 상자 하나를 옮겼다. 바닥에 — 판자 하나가 있었다. 판자를 들어올리자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 — 서류 봉투가 있었다.

한상철이 봉투를 꺼냈다. 봉투 위에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機密(기밀)
朝鮮總督府 憲兵隊 情報課(조선총독부 헌병대 정보과)

한상철이 봉투를 열었다.

안에 — 종이 한 장.

特別指令 第47号

受信: 韓相哲(密偵 番号 M-112)
発信: 黒川源三 大尉(情報課 特別班)

命令:
延在熙(延在熙, 27歳, 忠清道出身)ノ行方ヲ追跡セヨ。
同人ハ渡米後、独立資金ノ募集活動ヲ行ヒタルモノト推定サル。
関連人物、資金ノ流レ、通信手段ヲ報告セヨ。

尚、十家門(10가문)ノ動向ニ注意ヲ払フベシ。

黒川源三

한상철이 종이를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연재희.

3.1운동 때 종로에서 만세를 외치던 청년. 조만석의 시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장윤보와 함께 다니던 남자. 긴 두루마기에 만년필을 꽂고 다니던 —

그 남자를 추적하라.

한상철이 종이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 한숨을 쉬었다.

한숨이 아니었다. 미소였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 한상철 스스로 막지 못했다.

돈.

쿠로카와 겐조 대위가 약속한 돈.

밀정 1건 보고에 10엔. 핵심 정보에 100엔. 체포로 이어지면 — 500엔.

한상철의 잡화상 한 달 매출이 30엔이었다.

500엔이면 — 1년 반 치 매출.

한상철이 봉투를 다시 바닥 밑에 숨겼다.

그리고 잡화상의 문을 열고 나섰다.

종로의 아침이었다.

국밥 냄새가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이발소 주인이 문 앞을 쓸고 있었다. 지게꾼이 짐을 지고 대로를 지나갔다.

한상철이 걸었다.

조만석의 시장 쪽으로.
<hr>
조만석.

종로 시장의 주인. 조 가문 2세대. 마흔하나.

3.1운동 뒤 시장이 반쯤 문을 닫았다. 일본 경찰이 시장을 수색하면서 상인들이 겁을 먹었다. 그러나 조만석은 문을 닫지 않았다. "시장이 문을 닫으면 사람들이 굶는다"고 말하며 — 매일 아침 다섯 시에 문을 열었다.

한상철이 시장에 들어섰다.

"만석이 형!"

한상철이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

조만석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체구. 두꺼운 손. 상인의 눈 — 사람을 읽는 눈.

"오, 상철이.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여."

"물건 좀 떼러 왔어요. 성냥하고 양초."

"거기 있다, 가져가."

한상철이 성냥 상자를 들고 이야기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형, 요새 장 선생님은 안 보이시네요."

장 선생. 장윤보.

조만석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장 선생이 왜?"

"아니, 그냥. 전에 가끔 시장에 오셨잖아요. 요새는 통 안 보여서."

"바쁜가 보지."

"바쁘시겠죠. 무역하시니까."

한상철이 웃었다. 해맑게.

"아, 그리고 — 연재희 씨도 요새 안 보이더라고요. 3.1날 종로에서 봤거든요. 만세 외치는 거. 근데 그 뒤로 통……"

조만석의 손이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 0.5초.

그러나 한상철은 보았다.

조만석의 손이 멈추는 그 0.5초가 —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연재희. 그 이름에 반응하는 몸.

"재희가 왜."

조만석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친구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겄어. 3월 이후로 소식이 없어."

거짓말이었다.

한상철은 알고 있었다. 조만석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연재희는 미국에 갔다. 독립자금을 모으러. 한상철은 그것을 — 아직 정확히는 몰랐지만 — 짐작하고 있었다. 종로 헌병대에서 흘러나온 단편적인 정보.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의 보고. '조선인 활동가가 미주 한인 사회에서 모금 활동 중.'

이름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 한상철의 임무였다.

"그렇군요. 아, 형, 외상 장부에 한 줄만 더 달아주세요."

"또 외상이여?"

"다음 달에 갚을게요."

한상철이 성냥 상자를 들고 나갔다.

시장 문을 나서며 — 한상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차가운 눈.

종로의 '착한 상철이'는 — 사라졌다.

대신 — 밀정 M-112가 걷고 있었다.
<hr>
한상철의 과거를 말해야 한다.

1895년. 종로 태생.

아버지 한동수는 종로에서 잡화상을 했다. 어머니는 한상철이 여섯 살 때 병으로 죽었다.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았다. 술을 마셨다. 잡화상은 기울었다.

열다섯 살에 아버지가 죽었다. 빚이 남았다.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 진 빚. 잡화상을 빼앗길 뻔했다.

그때 — 헌병대 통역관이 찾아왔다.

"한상철 군. 일본어 할 줄 알지?"

할 줄 알았다. 종로의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며 배운 일본어.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 의사소통은 됐다.

"빚을 갚아줄 수 있어. 대신 — 가끔 이야기 좀 해줘."

이야기.

종로에서 들리는 이야기. 누가 누구를 만났고, 누가 무슨 말을 했고, 누가 어디에 갔고.

열다섯 살 소년에게 — 빚 탕감과 약간의 용돈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9년.

한상철은 9년 동안 헌병대에 정보를 전달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 — 시장의 소문, 이웃의 불평. 그러나 점차 — 독립운동가들의 동향, 비밀 모임의 장소, 자금의 흐름.

1919년 3월 1일.

한상철도 종로에 있었다. 만세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 한상철은 무엇을 느꼈을까.

가슴이 뛰었다. 솔직히 말하면 — 가슴이 뛰었다. 만세 소리가 종로를 채울 때, 한상철도 조선인이었으니까.

그러나 — 한상철은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

대신, 골목 그늘에 서서 — 누가 태극기를 흔들었는지 기록했다. 누가 연설했는지. 누가 주도했는지.

그 명단이 헌병대에 전달되었다.

3.1운동 이후 체포된 사람들 중 — 한상철의 정보 때문에 잡힌 사람이 스물세 명이었다.

한상철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 잠을 잤다.

사람은 익숙해진다. 배신에도. 죄책감에도.

한상철에게 밀정은 직업이었다. 잡화상이 물건을 파는 것처럼, 밀정은 정보를 팔았다. 차이가 있다면 — 잡화상의 물건은 성냥과 비누이고, 밀정의 물건은 사람의 목숨이었다.

그 차이를 — 한상철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하면 — 잠을 못 자니까.
<hr>
9월 15일. 종로 헌병대.

한상철이 뒷문으로 들어갔다.

헌병대 건물은 종로 대로변에 있었다. 붉은 벽돌 2층 건물. 정문에는 보초가 서 있었고,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 조선인들은 이 건물 앞을 지날 때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걸었다.

한상철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뒷골목의 작은 문. 밀정 전용 출입구.

복도를 지나, 2층 끝 방.

문에 한자로 적혀 있었다.

情報課(정보과)

한상철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일본어.

문을 열었다.

방 안에 — 남자가 앉아 있었다.

쿠로카와 겐조.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흔이라면 마흔 같고, 쉰이라면 쉰 같았다.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 군인 같지 않았다. 학자 같았다. 두꺼운 안경. 가늘고 긴 손가락. 책상 위에 책이 쌓여 있었다 — 조선어 사전, 중국 지도, 영자 신문.

"상철."

쿠로카와가 말했다. 조선어로.

유창한 조선어. 경상도 억양이 섞인 — 조선 남부에서 오래 근무한 흔적.

"겐조 대위님."

한상철이 고개를 숙였다.

"앉아."

한상철이 의자에 앉았다.

쿠로카와가 서류를 꺼냈다. 사진 한 장.

"이 남자를 아나?"

사진 속 남자.

연재희.

3.1운동 직전에 백경수의 사진관에서 찍힌 사진. 두루마기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단단했다.

"연재희. 종로에서 본 적 있습니다."

"어떤 인물이지?"

"양반가 출신입니다. 충청도. 한학자의 아들이라 들었습니다. 3.1때 종로에서 만세를 외쳤고 — 그 뒤로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

"경성에 없습니다. 4월쯤부터 안 보입니다."

쿠로카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미국에 갔다."

한상철이 눈을 깜빡였다.

"미국이요?"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의 보고다. 조선인 활동가가 미주 한인 사회를 순회하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있다. 이름은 확인 못 했지만 — 나이와 인상착의가 일치한다."

쿠로카와가 사진을 탁자 위에 놓았다.

"연재희. 이 남자가 모금한 돈이 상하이로 갔다는 정보가 있다."

"상하이요?"

"임시정부. 알지?"

한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4월 상하이에 세워진 망명정부. 이승만이 대통령, 이동휘가 국무총리.

"이 자금이 — 어디로 가는지 추적해야 한다."

쿠로카와가 지도를 펼쳤다. 동아시아 지도. 조선, 중국, 일본.

"경성에서 상하이로 가는 자금 루트. 누가 운반하고, 어떤 경로를 쓰는지. 그리고 — 연재희가 돌아오면, 그의 모든 행적을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상철."

쿠로카와가 한상철을 바라보았다.

"이번 건은 — 크다. 단순한 독립운동가 한 명이 아니야. 이 뒤에 큰 자금이 있다. 2천만 달러라는 소문이 도는데 — 그게 사실이면 제국의 안보 문제다."

2천만 달러.

한상철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건을 성공시키면 — 너의 지위가 달라진다, 상철."

"지위가요?"

"밀정이 아니라 — 정식 정보원이 될 수 있어. 일본 국적. 공무원 대우. 연금."

일본 국적.

한상철의 가슴이 — 뛰었다.

조선인 잡화상. 빚에 쪼들리는 열다섯 살부터 밀정. 종로 뒷골목의 쥐.

그러나 일본 국적을 얻으면 — 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상철이 고개를 숙였다.

쿠로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그리고 — 장윤보. 그 자부터 시작해라."

한상철이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었다.

헌병대를 나섰다.

종로의 햇살이 눈부셨다.

한상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장윤보.

10가문의 장 가문. 무역상. 연재희의 가장 가까운 동지.

장윤보부터 시작하면 — 모든 실타래가 풀릴 것이다.

한상철이 종로 시장 쪽으로 걸었다.

착한 상철이의 얼굴을 다시 쓰고.

웃으며.
<hr>
9월 20일. 경성 종로. 백경수의 사진관.

한상철이 사진관 문을 열었다.

"경수 어르신, 사진 한 장 찍으러 왔습니다."

백경수. 서른하나. 10가문의 백 가문. 사진관 '경수사진관'을 운영하며, 3.1운동 현장을 촬영한 유일한 한국인 사진사.

"상철이? 사진은 무슨. 돈도 없으면서."

"어르신, 요새 사진관이 한산하시죠?"

"일본놈들이 수색한 뒤로…… 손님이 뚝 끊겼지."

한상철이 사진관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경성의 풍경. 종로의 거리. 남대문. 그리고 — 인물 사진.

한상철의 눈이 — 한 곳에서 멈췄다.

벽 한쪽에 걸린 단체 사진.

열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복을 입은 사람, 양복을 입은 사람. 가운데 — 장윤보. 그 옆에 — 연재희.

3.1운동 직전에 찍힌 사진이 분명했다.

"어르신, 이 사진 — 언제 찍으신 거예요?"

"음? 아, 그거. 올해 초에…… 2월이었나."

"여기 연재희 씨도 있네요."

백경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철아. 연재희는 왜?"

"아니, 그냥. 요새 안 보여서."

"그 친구는 — 어디 갔는지 모른다."

또 같은 대답. 조만석과 같은 대답. '모른다.'

한상철은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날씨, 시장 경기, 쌀값. 10분쯤 잡담한 뒤 사진관을 나왔다.

그러나 — 한상철은 이미 필요한 것을 얻었다.

단체 사진. 10가문의 사진.

그 사진에 누가 있었는지 — 얼굴을 모두 기억했다. 9년 동안 밀정으로 훈련된 기억력.

장윤보. 연재희. 백경수. 조만석. 서광제. 이상덕. 최동진. 한예린. 송학주. 윤달성.

열 명.

10가문.

한상철이 잡화상으로 돌아갔다. 뒷방의 바닥판을 들어올리고, 종이를 꺼내 이름을 적었다.

열 개의 이름 옆에 — 가문, 직업, 주소를 적어나갔다.

쿠로카와 겐조에게 보낼 보고서.

한상철의 손이 — 떨리지 않았다.

9년이면 — 충분히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