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2 태평양을 건너

Ch.2 태평양을 건너 — Part 8 — 사탕수수

Part 8 — 사탕수수 (하와이, 1919년 5~6월)

오월.

호놀룰루.

배에서 내리자마자 — 바람이 달랐다. 샌프란시스코의 건조한 바람이 아니라, 습하고 따뜻한 바람. 야자나무가 흔들렸다. 꽃 냄새가 났다. 파인애플 냄새가 났다.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 아름다운 섬에서 — 조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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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알루아 사탕수수 농장.

오전 네 시.

하늘이 아직 어두웠다. 별이 남아 있었다. 그 별 아래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막사. 양철 지붕, 나무 벽, 흙바닥. 한 막사에 스무 명이 잤다. 나무 침대가 빼곡히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 — 조선인들이 누워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

루나(luna)가 소리쳤다. 감독관. 포르투갈인이었다. 가죽 채찍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어났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어제도 열두 시간을 일했으니까.

연재희가 그 광경을 보았다.

박용만이 데려온 것이었다. "직접 보시오. 말로는 부족하오."

막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남자, 여자. 이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흰 작업복을 입고,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긴 낫을 들고. 새벽어둠 속으로 걸어나가는 사람들.

그 뒤를 연재희가 따라갔다.

사탕수수밭.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사탕수수가 빽빽이 서 있었다. 그 사이로 들어가면 —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초록색 터널. 그 안에서 — 낫이 움직였다.

척. 척. 척.

사탕수수를 베는 소리. 수백 개의 낫이 동시에 움직이는 소리. 땀이 흘렀다. 새벽부터 흘리는 땀. 아침이 되면 옷이 젖고, 점심이 되면 쓰러지고, 저녁이 되면 — 기어서 막사로 돌아갔다.

연재희가 한 노동자 옆에 섰다.

"어디서 오셨소?"

"경상도요."

"언제 왔소?"

"칠 년 전이요. 1912년."

"왜 왔소?"

노동자가 웃었다. 쓸쓸한 웃음.

"돈 벌러 왔지요. 삼 년만 일하면 돈 모아서 돌아간다고…… 그렇게 듣고 왔지요."

"칠 년이 되었는데?"

"돌아갈 데가 없어졌지요. 나라가 없어졌으니."

노동자가 낫을 휘둘렀다. 척. 사탕수수 한 줄기가 쓰러졌다.

"월급이 얼마요?"

"십오 달러."

"한 달에?"

"한 달에. 그중 다섯 달러는 막사비로 나가고, 세 달러는 밥값으로 나가고. 남는 것은 일곱 달러."

일곱 달러. 매일 열두 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남는 돈이 일곱 달러.

"그 일곱 달러로 뭘 하시오?"

"고향에 부치지요. 어머니한테."

"어머니가 살아 계시오?"

"모르겠소. 칠 년째 편지가 없으니."

노동자가 고개를 숙이고 낫을 휘둘렀다. 척. 척. 척.

연재희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미주 동포의 현실이었다. 아름다운 하와이. 야자수와 파인애플의 섬. 그 뒤에 — 사탕수수밭에서 피를 흘리는 조선인들이 있었다.
<hr>
저녁.

막사 앞 공터.

모닥불을 피웠다. 노동자 이백여 명이 둘러앉았다. 박용만이 연재희를 소개했다.

"여러분, 조선에서 오신 분이오. 삼월 초하루 만세를 부르신 분이오."

술렁임.

"만세?"

"조선에서 만세를 불렀단 말이오?"

"사실이오?"

연재희가 일어섰다.

모닥불이 얼굴을 비추었다. 이백 개의 얼굴이 불빛에 떠올랐다. 그을린 얼굴. 주름진 얼굴. 젊은 얼굴. 늙은 얼굴. 그러나 모든 얼굴에 —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연재희가 말했다.

"조선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

"삼천만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백 명이 숨을 죽이고 들었다.

"여러분이 베는 사탕수수의 달콤함만큼이나 — 만세는 달콤했습니다."

누군가 코를 훌쩍였다.

"하지만 그 뒤에 — 일본 놈들이 칼을 뽑았습니다. 총을 쐈습니다. 피가 흘렀습니다."

모닥불이 타닥 소리를 냈다. 불꽃이 하늘로 올라갔다.

"여러분. 조선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재희가 이백 명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의 손에서 흘린 땀이 — 조선의 독립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달러가 — 독립군의 밥이 됩니다. 여러분의 10센트가 — 태극기 한 장이 됩니다."

침묵.

그리고 한 여인이 일어섰다. 서른쯤 된 아낙네. 손에 물집이 가득한 여인.

"얼마를 내면 됩니까?"

"여러분이 낼 수 있는 만큼."

"월급 전부를 내도 됩니까?"

연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여러분이 살아야 조선도 삽니다. 일곱 달러 중 — 일 달러만."

"일 달러?"

"일 달러. 한 달에 일 달러."

모닥불 앞에서 이백 명이 웅성거렸다. 일 달러. 한 달 일하고 남는 칠 달러 중 일 달러. 적지 않았다. 그러나 —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 달러.

여인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필요 없어요. 이것이…… 조선에 갈 수 있다면."

한 명, 두 명, 세 명. 줄이 생겼다. 이백 명이 줄을 섰다.

동전이 쌓였다. 달러가 쌓였다.

박용만이 세었다.

"이천삼백사십 달러."

이천삼백사십 달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이백 명의 한 달치 기부금.

연재희가 돈을 바라보았다. 동전 위에 — 땀이 묻어 있었다. 사탕수수밭의 땀. 열두 시간 노동의 땀.

이것이 — 피와 땀의 달러였다.
<hr>
유월.

연재희가 하와이 섬 전체를 돌았다. 와이알루아, 에와, 와이파후, 와이키키 근처 작은 농장들까지. 한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농장마다 연설했다. 모닥불 앞에서, 막사 안에서, 때로는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서. 만세의 이야기를, 피의 이야기를, 아이의 이야기를.

모금이 쌓였다.

와이알루아: $2,340
에와: $1,128
와이파후: $890
기타: $576

하와이 합계: $4,934.

칠천 명의 한인 중 삼천 명 이상이 기부했다. 한 사람 평균 1달러 60센트. 월급의 10분의 1이 넘는 금액.

박용만이 말했다.

"연 선생, 이 정도면…… 대단한 것이오."

"이천만 달러에 비하면 먼지요."

"먼지도 모이면 산이 되오."

박용만이 웃었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 솔직히 말하겠소."

"무엇을?"

"모금만으로는 부족하오. 무장투쟁이 필요하오. 일본 놈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으면 — 만세만으로는 영원히 못 이기오."

연재희가 대답하지 않았다. 안창호의 교육론, 박용만의 무장투쟁론. 두 가지 다 틀리지 않았다.

"나는…… 돈을 모으겠소."

연재희가 말했다.

"총이 필요하면 돈으로 사면 되오. 학교가 필요하면 돈으로 세우면 되오. 신문이 필요하면 돈으로 찍으면 되오."

"돈이면 다 되는 것이오?"

"다 되지는 않소. 하지만 돈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오."

박용만이 한참 연재희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장사치가 아닌데, 장사치의 논리를 쓰는구려."

"장사치의 논리가 아니오. 현실의 논리요."

박용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쪽에서도 정기 모금을 조직하겠소. 매달 농장별로 모아서 보내겠소."

"감사합니다."

"감사는…… 조선이 독립한 뒤에 하시오."

두 사내가 하와이의 밤하늘 아래서 악수했다. 야자나무 위로 남십자성이 빛나고 있었다. 경성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