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2 태평양을 건너
Ch.2 태평양을 건너 — Part 7 — 도산 안창호
Part 7 — 도산 (로스앤젤레스, 1919년 4월 중순)
사월 십이일.
로스앤젤레스.
기차를 타고 열두 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경성과는 달랐다. 뜨겁고 건조한 빛. 아카시아와 야자나무가 선로 옆에 늘어서 있었다.
흥사단 본부.
2층짜리 목조 건물. 문패에 '대한인 흥사단(興士團)' 이라고 적혀 있었다.
연재희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안경을 쓴 사내가 서 있었다. 단정한 양복.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눈. 사진으로만 보았던 얼굴이었다.
안창호.
도산 안창호.
"들어오시오."
안창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연재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차를 내왔다. 미국식 홍차. 연재희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바다 위에서 미지근한 물만 마시다가 뜨거운 차를 마시니 — 가슴이 녹는 것 같았다.
"장윤보의 편지를 받았소."
안창호가 소개장을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삼월 초하루에 계셨다면서?"
"그렇습니다."
"이야기해주시오. 전부."
연재희가 이야기했다. 탑골공원. 만세 소리. 태극기. 헌병. 피. 아이의 탄생. 동지들의 맹세. 그리고 — 태평양.
안창호가 조용히 들었다. 차 한 잔을 내내 들고 있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 한 모금 마셨다.
"이천만 달러."
안창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큰 돈이오."
"압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소?"
"임시정부 운영, 독립군 양성, 국제 여론 환기. 그리고……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 보관하겠습니다."
"보관?"
안창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어디에?"
"스위스. 중립국 은행에."
안창호가 잠시 침묵했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똑. 똑. 똑. 생각하는 버릇인 것 같았다.
"연 선생."
"네."
"한 가지 물어보겠소."
"무엇이든."
"당신은…… 지금 당장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연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대답하시오."
"……모르겠습니다."
"나는 안다고 생각하오."
안창호가 연재희를 똑바로 보았다.
"지금 당장은 — 안 됩니다."
그 말이 교회 안에서 나왔다면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흥사단 본부 응접실이었다. 안창호와 연재희, 둘뿐이었다.
"일본은 강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오십 년간 서양의 기술과 군사력을 흡수한 나라요. 조선은…… 아직 약합니다."
"그래서 만세만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만세는 시작이오.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린 것이오. 그러나 시작이 끝은 아니오."
안창호가 일어나 창가로 갔다. 로스앤젤레스의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오. 교육, 실업, 그리고 단결. 이 세 가지가 없으면 독립은 구호에 그칩니다."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 돈을 모으시오. 하지만 돈만 모아서는 안 됩니다."
안창호가 돌아보았다.
"사람을 모으시오."
"사람?"
"돈은 쓰면 없어집니다. 사람은 — 늘어납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두 사람이 넷을. 그것이 진정한 자본이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산 선생."
"응."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무엇이오?"
"독립이…… 언제 올 것 같습니까?"
안창호가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야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겠소. 십 년이 될 수도, 오십 년이 될 수도, 백 년이 될 수도 있소."
"백 년……"
"하지만."
안창호가 연재희를 보았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반드시 옵니다. 그것만은 확실하오."
연재희가 품속의 만년필을 만졌다. 차가운 금속. '眞實' 두 글자.
'백 년이면…… 2019년.'
물론, 연재희는 몰랐다. 독립이 26년 뒤인 1945년에 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통일은 — 111년 뒤인 2030년에 올 것이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도산 선생."
"감사할 것 없소. 한 가지 더."
안창호가 서류함에서 명단을 꺼냈다.
"미주 한인 주요 인사 명단이오. 사업가, 농장주, 교회 지도자. 이 사람들을 만나면 모금에 도움이 될 것이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 무장투쟁파 사람들도 있으니 조심하시오. 박용만 쪽은…… 뜨거운 사람들이오. 좋은 뜻이지만, 방법이 급하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교론의 안창호와 무장투쟁론의 박용만. 독립운동의 두 노선. 그 사이에서 연재희는 — 제3의 길을 가려 했다.
돈.
돈은 어떤 노선이든 필요했다. 외교를 하든, 싸우든, 교육을 하든 — 돈이 있어야 했다.
"돈은 노선이 없습니다."
연재희가 말했다.
안창호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 말이 맞소. 돈은 노선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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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본부를 나서며, 안창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연 선생."
"네."
"기자가 되고 싶다 하셨지?"
"진실을 기록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좋은 꿈이오. 하지만 — 진실은 위험하오. 특히 이 시대에는."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가겠소?"
"갑니다."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진실을 기록하시오. 죽으면 진실도 죽소."
연재희가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로 나섰다. 주머니에 안창호가 준 명단, 가슴에 만년필, 등에 이천만 달러의 무게.
다음 목적지 — 하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