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2 태평양을 건너

Ch.2 태평양을 건너 — Part 3 — 별을 보는 밤

Part 3 — 폭풍 (항해 13~15일차, 1919년 3월 20~22일)

삼월 이십일. 열셋째 날.

새벽.

진 선주가 갑판에서 하늘을 읽고 있었다.

서쪽 수평선 위에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보통 구름이 아니었다.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벽. 그 벽이 바다를 향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폭풍이네."

진 선주의 얼굴이 굳었다. 삼십 년 바다 사내의 얼굴이 그렇게 굳는다면 — 보통 폭풍이 아니었다.

"큰 놈인가?"

연재희가 물었다.

"삼월 태평양의 큰 놈이야. 기상도가 없으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바람 방향과 구름 모양을 보면, 이삼 일은 갈 것이네."

"이삼 일?"

"모든 것을 묶게. 풀려 있는 것은 전부 날아가네."

진 선주가 호각을 불었다. 선원 열두 명이 갑판으로 뛰어나왔다. 돛을 내리고, 화물을 밧줄로 묶고, 해치를 닫았다. 봉황호가 폭풍을 맞을 준비를 했다.

연재희가 화물칸으로 내려갔다. 보따리를 풀었다. 만년필을 확인했다.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정순의 비단 주머니를 저고리 안쪽에 묶었다. 맹서 사본을 방수 기름종이로 감쌌다.

"이것만은 — 잃을 수 없다."

소명이 내려왔다.

"아저씨, 무서워?"

"무섭다."

"나도."

소명이 솔직했다. 바다에서 자란 소년이지만 — 폭풍은 무서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말했어. 폭풍이 무서우면 배에서 내리라고. 배에서 안 내릴 거면 — 무서워하지 말라고."

"네 아버지는 현명한 분이구나."

"미친 사내라니까."

소명이 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바람이 시작되었다.
<hr>
오후.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봉황호가 산처럼 솟았다가, 계곡처럼 내려꽂혔다. 파도가 갑판을 넘었다. 바닷물이 해치 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화물칸이 물바다가 되었다.

쌀 가마니가 미끄러졌다. 이백 근짜리 가마니가 배의 흔들림에 따라 좌우로 굴러다녔다. 연재희가 기둥을 잡고 버텼다. 옆에서 소명이 밧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쾅.

배가 크게 흔들렸다. 파도가 선체를 정면으로 때린 것이었다. 연재희의 손이 기둥에서 미끄러졌다. 몸이 화물칸 벽으로 날아갔다. 등이 나무벽에 부딪쳤다.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아저씨!"

소명이 소리쳤다.

연재희가 일어나려 했다. 그때 — 주머니에서 무언가 빠져나갔다.

만년필.

충격으로 주머니가 찢어진 것이었다. 검은 만년필이 물바닥 위를 미끄러져 갔다. 배가 기울자 — 만년필이 배수구 쪽으로 굴러갔다.

배수구. 바다로 통하는 구멍.

"안 돼——!"

연재희가 몸을 던졌다. 물바닥 위를 기어갔다. 배가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만년필이 방향을 바꿔 굴러왔다. 손을 뻗었다. 손끝이 만년필 끝에 닿았다. 잡으려는 순간 — 배가 다시 기울었다. 만년필이 미끄러졌다.

"안 돼!"

연재희가 다시 몸을 던졌다. 무릎이 쇠못에 찢어졌다. 피가 났다. 상관없었다.

만년필.

아버지의 서재에서 찾은 만년필. 탑골공원에서 주운 만년필. '眞實' 두 글자가 새겨진 만년필. 이것을 바다에 빼앗길 수 없었다.

손이 닿았다.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은 순간 — 만년필이 빛났다. '眞實' 두 글자가 금빛으로 번쩍였다. 어둠 속에서, 폭풍 속에서, 물바닥 위에서.

소명이 보았다.

"아저씨…… 그 펜, 빛나?"

"……"

연재희가 만년필을 가슴에 안았다.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찰나의 빛. 보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빛.

"착각이다."

"착각?"

"번개가 비친 것이겠지."

소명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폭풍이 대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hr>
밤.

폭풍이 절정에 달했다.

봉황호의 돛대 하나가 부러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앞돛대가 갑판 위로 쓰러졌다. 선원 한 명이 깔렸다. 비명이 들렸다. 다른 선원들이 달려가 돛대를 들어올렸다.

화물칸의 물이 허리까지 찼다. 연재희와 소명이 쌀 가마니 위로 올라갔다. 가마니 위에 쪼그려 앉아, 물이 차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저씨."

"응."

"우리…… 죽어?"

소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바다에서 자란 소년이 — 처음으로 두려운 목소리를 냈다.

연재희가 소명의 어깨를 감쌌다.

"안 죽는다."

"어떻게 알아?"

"약속을 안 지켰으니까."

"약속?"

"아내에게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날까지 살아서 돌아가겠다고. 그 약속을 지키기 전에는 — 죽을 수 없다."

소명이 연재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물에 젖고, 피가 나고, 지친 얼굴. 그러나 눈은 — 불이 붙어 있었다.

"아저씨…… 진짜 미쳤다."

"미쳤지."

"그래서…… 안 죽는 거야?"

"미친 놈은 잘 안 죽는다. 기억해라."

소명이 울면서 웃었다. 아니, 웃으면서 울었다. 폭풍 속에서, 물 위의 쌀 가마니 위에서, 나라 잃은 사내와 바다의 소년이 — 울면서 웃고 있었다.
<hr>
삼월 이십일일. 열넷째 날.

폭풍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람이 약해지고, 파도가 낮아지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봉황호는 살아남았다. 앞돛대가 부러지고, 화물의 삼분의 일이 물에 젖고, 선원 한 명이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 배는 떠 있었다.

진 선주가 갑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피로한 얼굴. 이틀 밤을 한 잠도 못 자고 키를 잡은 얼굴.

"살았네."

연재희가 갑판에 올라왔다.

"살았습니다."

"연 선생."

"네."

"바다는 싸우는 것이 아니야."

"……?"

"읽는 것이야."

진 선주가 수평선을 가리켰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수평선. 깨끗하게 씻긴 하늘. 짙푸른 바다.

"폭풍이 오면 —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네. 바람의 방향을 읽고, 파도의 리듬을 읽고, 배의 한계를 읽고. 그래야 살아남네."

"싸우면 안 됩니까?"

"싸우면 지네. 바다한테는 아무도 못 이기니까."

진 선주가 연재희를 돌아보았다.

"독립도…… 그런 것 아니겠소?"

연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일본이라는 폭풍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시대를 읽고, 힘의 방향을 읽고, 우리의 한계를 읽고. 그래야 살아남지."

연재희가 수첩을 꺼냈다.

삼월 이십일일.

폭풍이 지나갔다.
살았다.

진 선주의 말.
"바다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독립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지금 당장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
읽어야 한다.
시대를 읽고, 힘을 모으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이천만 달러는 싸우기 위한 돈이 아니다.
기다리기 위한 돈이다.
읽기 위한 돈이다.

그 때가 올 때까지 — 지키는 돈이다.

삼월 이십이일. 열다섯째 날.

맑음. 바람 약함. 파도 잔잔.

폭풍 뒤의 태평양은 — 다른 바다였다.

어제까지 괴물이던 바다가, 오늘은 어머니의 품처럼 고요했다. 배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갈매기가 돌아왔다. 물고기가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소명이 갑판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중국 뱃노래. 연재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선율은 — 조선의 뱃노래와 비슷했다.

바다의 노래는 어디서나 같았다.

슬프고, 넓고,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