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2 태평양을 건너

Ch.2 태평양을 건너 — Part 2 — 폭풍

Part 2 — 바다 위의 교실 (항해 8~12일차, 1919년 3월 15~19일)

삼월 십오일. 여덟째 날.

맑음. 바람 보통. 파도 잔잔.

진소명이 한글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갑판 위, 빨랫줄에 걸린 선원들의 옷이 바람에 펄럭이는 아래서, 열여섯 살 소년과 스물일곱 살 사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 — 라."

소명이 손가락으로 갑판 위에 적었다.

"나라. 맞지?"

"맞다."

"나라…… 아저씨 나라 이름이 뭐야?"

"조선이라고도 하고, 대한이라고도 한다."

"대한?"

"크다는 뜻의 대(大), 겨레를 뜻하는 한(韓)."

소명이 한참 생각하더니 물었다.

"아저씨 아들 이름도 대한이라며?"

"그래."

"나라 이름이랑 같잖아."

"같지."

"아들한테 나라 이름을 붙였어?"

"나라한테 아들 이름을 붙인 것이지."

소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연재희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말은 설명할 수 없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입에서 저절로 나온 이름.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자, 다음."

연재희가 갑판 위에 적었다.

독 — 립

"독립. 읽어보아라."

"독…… 립. 독립?"

"뜻을 알겠느냐?"

"혼자 선다는 뜻이지? 중국어로는 두리(獨立)야."

"같은 한자다."

"조선도 독립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다."

소명이 끄덕였다. 그리고 갑판 위에 큰 글씨로 적었다.

대 한 독 립

"이거 맞아?"

"맞다."

"아저씨, 이거 외치면 잡혀가?"

"조선에서는 잡혀간다."

"여기는?"

연재희가 바다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물. 수평선. 갈매기. 배 한 척.

"여기는…… 아무도 안 잡아가지."

소명이 벌떡 일어섰다. 돛대 위로 올라가더니, 태평양을 향해 소리쳤다.

"대한독립! 만세!"

발음이 엉망이었다. '대한'이 '따한'이 되고, '만세'가 '만쎄'가 되었다. 그러나 — 태평양이 그 소리를 받았다.

"만세! 만세!"

소명이 웃으며 계속 외쳤다. 중국 소년이 태평양 한가운데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연재희가 웃었다. 며칠 만에 처음 웃었다.

그리고 — 자기도 일어섰다.

"만세!"

두 목소리가 태평양 위에 울려퍼졌다.

갈매기가 놀라 날아올랐다. 돛대가 흔들렸다. 선원 두어 명이 고개를 내밀고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쳤다. 미친 것이 맞았다. 그래서 좋았다.
<hr>
삼월 십육일. 아홉째 날.

흐림. 바람 약함.

오늘 소명이 중국어를 가르쳐주었다.

갑판 밑 화물칸에서 마주 앉아, 연재희가 중국어를, 소명이 한글을 교환했다.

"바다 — 하이(海)."

"하이."

"하늘 — 티엔(天)."

"티엔."

"나라 — 궈(國)."

"궈."

"친구 — 펑요우(朋友)."

"펑요우?"

"그래. 우리 펑요우야."

소명이 씩 웃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가 드러났다.

연재희가 수첩에 적었다.

바다 위에서 친구를 얻었다.
열여섯 살 중국 소년 진소명.

이 소년은 나라가 무엇인지 안다.
잃어본 적은 없지만,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니까.
중국도 아편에 찢기고 군벌에 갈라지고 있으니까.

나라를 잃은 자와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자 사이에는 — 말이 통한다.
중국어든 한국어든 상관없이.

연재희가 수첩을 덮고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한 줄을 더 적었다.

독립신문 미주판.
이름을 뭘로 할까.

'진실(眞實)'은 지하신문으로 쓸 이름이다.
미주에서 펴낼 신문에는 — 더 넓은 이름이 필요하다.

'한인공보(韓人公報)'?
'자유한국(自由韓國)'?
'코리안 투데이(The Korean Today)'?

마지막 것이 좋다.
영어로 써야 미국인도 읽는다.
진실은 조선인만의 것이 아니니까.

연재희가 이 이름을 적은 것은 1919년 3월 16일이었다.

The Korean Today.

이 이름이 실제로 신문 제목이 되는 것은 — 26년 뒤, 1945년 8월 17일.

아들 연대한의 손에 의해서.
<hr>
삼월 십칠일. 열째 날.

맑음. 바람 강함. 파도 높음.

항해의 절반이 지났다.

연재희가 갑판에 올라가 뱃머리에 섰다. 바람이 옷을 할퀴었다. 앞에 수평선, 뒤에 수평선.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 물뿐이었다.

"절반이라……"

상하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스물하루. 열흘이 지났으니 절반을 조금 넘긴 것이다.

그런데 — 이상한 것이 있었다.

뱃멀미가 멈추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배의 흔들림이 고통이 아니라, 리듬이 되었다. 흔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양수에 둘러싸여 흔들리던 —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처럼.

"바다에 적응한 것이네."

진 선주가 갑판을 닦으며 말했다.

"삼 일이면 토하고, 칠 일이면 참고, 열흘이면 친해지네. 그것이 바다야."

"사람도 그렇습니까?"

"사람은 더 빠르지. 하루면 만나고, 삼 일이면 정들고, 열흘이면 가족이야."

진 선주가 갈매기를 가리켰다.

"저 새를 보게. 날개가 있는데도 바다 위에 내려앉네. 왜 그런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쉬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야.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러는 것이지. 잠깐 내려앉아서 —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이야."

"물속을?"

"그래. 바다 위에서는 바다가 안 보이네. 하늘에서는 더더욱 안 보이고. 바다를 보려면 — 바다 위에 내려앉아야 하네."

연재희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짙푸른 물.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 보이지 않았다.

"진 선주."

"응."

"나도 지금…… 내려앉은 것입니까?"

진 선주가 웃었다.

"그렇지. 조선이라는 하늘에서 날다가, 태평양이라는 바다에 내려앉은 것이지. 여기서 물속을 들여다보게. 그러면 보일 것이네."

"무엇이요?"

"가야 할 곳이."
<hr>
삼월 십팔일. 열한째 날.

맑음. 바람 없음. 파도 잔잔.

바다가 거울이었다.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사라지자, 태평양이 — 하늘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수평선이 사라지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녹아내렸다. 배가 하늘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연재희가 뱃전에 기대어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자기 얼굴이 비쳤다.

수염이 자란 얼굴. 눈 밑에 그늘이 진 얼굴. 열하루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 그러나 눈은 — 밝았다.

"너는 누구냐."

물속의 자신에게 물었다.

물속의 연재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 파문이 일었다. 작은 물결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잔잔해졌을 때, 거기에 비친 것은 — 연재희의 얼굴이 아니었다.

대한이의 얼굴.

갓 태어난 아이. 주먹을 불끈 쥔 채 울고 있는 아이.

물론, 착각이었다. 파문이 만들어낸 물 위의 환각. 그러나 연재희는 —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고 믿었다.

"대한아."

물속을 향해 속삭였다.

"아버지가 반드시 돌아간다."

바다가 잔잔했다. 대답 대신 — 고요함을 돌려주었다.
<hr>
삼월 십구일. 열두째 날.

흐림. 바람 약함.

밤.

별이 없었다.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배가 어둠 속을 나아가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뒤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엔진의 털털거리는 소리만이 — 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화물칸에서 진소명이 찾아왔다.

"아저씨. 잠 안 와?"

"안 온다."

"나도. 이야기해줘."

"무슨 이야기?"

"조선 이야기. 아저씨 나라 이야기."

연재희가 쌀 가마니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소명이 옆에 앉았다. 등유 램프 하나가 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옛날에……"

연재희가 입을 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있었다? 없어진 거야?"

"없어지지 않았다. 빼앗겼다."

"누구한테?"

"일본한테."

소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열여섯이지만, 이 소년은 일본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군은 같은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일본 놈들……"

"그래.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켰다. 1910년이었다. 내가 열여덟 살이었지."

"그때 뭘 했어?"

"울었다."

"울기만 했어?"

"울기만 했다. 열여덟 살짜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소명이 조용히 들었다.

"그런데……"

연재희가 등유 램프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올해, 삼월 초하루. 만세를 불렀다."

"아저씨가?"

"나만이 아니다. 온 나라가."

"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돼?"

"모르겠다.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영원히 되지 않는다."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응."

"돌아가면…… 나한테도 편지 써줘."

"편지?"

"한글로. 내가 읽을 수 있게."

연재희가 웃었다.

"좋다. 약속하마."

"약속이야?"

"약속이다."

소명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중국에도 이런 풍습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배운 것인지.

연재희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바다 위에서 맺은 약속.

연재희는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미주에서 돌아온 뒤 체포되어 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으니까. 그리고 출소한 뒤에는 진소명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 2019년.

100년 뒤.

연만세가 코리안투데이 기자로서 상하이를 취재할 때, 황푸강변의 낡은 서점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구십여 세의 노인이 서가에서 한글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한글을 아십니까?"

연만세가 물었다.

노인이 미소 지었다.

"바다 위에서 배웠지."

그러나 이것은 — 아직 한참 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