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1 만세의 날

Ch.1 만세의 날 — Part 9 — 열두 번 돌아보다

Part 9 — 태평양 (1919년 3월 8일, 새벽)

새벽 네 시.

경성은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 척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불을 끄고, 대문을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일본 헌병의 야간순찰이 골목마다 지나갔다. 군화 소리가 사라질 때마다, 커튼 뒤에서 눈들이 빛났다.

연재희가 한옥 대문 앞에 섰다.

등에 보따리 하나. 옷 두 벌, 편지 세 통, 서광제가 준 약병 하나, 그리고 만년필.

그것이 전부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정순이 아이를 안고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아니 — 잠든 척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 여인이 남편이 떠나는 새벽에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연재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방문을 열고, 아내를 안고, 아이의 볼에 입맞추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이 작은 한옥에서, 이 여인과, 이 아이와,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 발을 돌렸다.

종로 뒷골목. 어둠 속을 걸었다.

모퉁이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장윤보.

"왔나?"

"왔네."

"가세."
<hr>
인천까지는 걸어서 여섯 시간.

장윤보와 연재희, 둘이서 경인가도를 걸었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삼월 초의 새벽은 아직 겨울이었다.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다.

"날씨가 차네."

"참을 만하네."

"태평양은 더 춥겠지."

"알겠네."

두 사내가 말없이 걸었다. 군화 소리 대신 짚신 소리가 흙길 위에 찍혔다. 사박. 사박. 사박.

오양목 — 부평을 지날 때, 장윤보가 입을 열었다.

"재희."

"응."

"한 가지 더 알려줄 것이 있네."

"무엇인가?"

"밀정이 있네."

연재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밀정?"

"우리 열 명 중에는 없네. 그것은 확실하네. 하지만 주변에…… 일본 총독부에 정보를 파는 조선인이 있네."

"누구인가?"

장윤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새벽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한상철."

"한상철이라……?"

"종로 일대에서 잡화상을 하는 사내네. 겉으로는 조선인 상인이지만, 뒤로는 일본 헌병대에 정보를 넘기고 있네."

연재희의 눈이 좁아졌다.

"증거는?"

"내 정보원이 확인했네. 한상철이 헌병대 본부를 드나드는 것을 세 번 봤네. 그리고…… 삼일 전 체포된 학생 열두 명 중 여섯 명의 은신처를 한상철이 알고 있었네."

"그 학생들이…… 밀고당한 것인가?"

"그렇다고 보네."

연재희의 주먹이 떨렸다. 같은 조선인이.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밥을 먹는 사내가. 동포를 일본에 팔아넘기고 있다.

"처리하겠나?"

장윤보가 물었다.

"아니."

연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네. 한상철을 건드리면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네."

"하지만……?"

"하지만 기억하겠네. 이 이름을. 한상철."

연재희가 만년필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적었다.

韓相哲.

"언젠가…… 정산하겠네."

장윤보가 연재희의 눈을 보았다. 그 눈 속에 — 불이 있었다. 만세를 부를 때의 불과는 다른, 차가운 불.

"알겠네."

두 사내가 다시 걸었다.
<hr>
인천항.

오전 열 시.

장윤보의 어선 '삼호'가 부두 한쪽에 매여 있었다. 십오 톤짜리 작은 어선. 고등어잡이에 쓰는 목선이었다.

"이 배로 상하이까지?"

"이 배가 작다고 무시하지 마라. 나흘이면 간다네."

장윤보가 배 위로 올라가 밧줄을 풀었다.

부두에는 일본 해군 초소가 보였다. 수병 두 명이 망원경을 들고 항구를 감시하고 있었다.

"저 놈들이 문제네."

"걱정 마라. 삼호는 어업 허가증이 있네. 고등어 잡으러 나가는 것이지."

장윤보가 어선 갑판의 어상자를 가리켰다. 얼음과 고등어가 가득했다. 그 아래에 — 빈 공간이 있었다.

"들어가게."

연재희가 어상자 아래 공간으로 몸을 구겼다.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고등어의 비린내. 얼음의 한기. 그 속에서 연재희는 조국을 떠나고 있었다.

삼호의 엔진이 털털거렸다. 기적 소리가 울렸다. 배가 부두를 벗어났다.

일본 해군 초소 앞을 지날 때, 장윤보가 뱃머리에 서서 수병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등어 잡으러 갑니다!"

수병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선 하나. 조선인 어부 하나. 그들의 눈에 위협은 아니었다.

배가 항구를 빠져나갔다.

서해. 회색빛 바다가 펼쳐졌다.

연재희가 어상자 뚜껑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인천항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 조선의 산이 보였다. 삼월의 산. 아직 눈이 덮인 산. 그 산 너머에 경성이 있고, 경성 어딘가에 아내와 아이가 있다.

"재희."

장윤보가 뱃머리에서 불렀다.

"응."

"울고 있나?"

"아니."

"거짓말이네."

연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눈물을 말려주고 있었다.

"윤보."

"응."

"조선이…… 작아지고 있네."

"작아지는 것이 아니네."

장윤보가 키를 잡으며 말했다.

"멀어지는 것이네. 하지만 멀어진다고 작아지는 것은 아니네. 네 가슴속에서는 오히려 커질 것이네."

연재희가 눈을 감았다.

맞았다. 조선은 작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질수록, 가슴속의 조선은 더 커지고 있었다.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더 아프게 되고 있었다.

배가 서해를 가르며 나아갔다.
<hr>
나흘 뒤.

상하이.

황푸강 하구에서 삼호가 닻을 내렸다. 장윤보가 연재희를 화물선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봉황호(鳳凰號).

삼천 톤급 화물선. 선체에 녹이 슬어 있었고,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중국인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짐을 옮기고 있었다.

선주 진(陳)이 장윤보를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장 선생! 오래간만!"

"진 형! 부탁할 것이 있소."

장윤보가 연재희를 가리켰다.

"이 사람을 샌프란시스코까지 데려다주시오."

진이 연재희를 훑어보았다. 날카로운 눈이었다. 바다 사내의 눈.

"조선인?"

"그렇소."

"독립운동?"

장윤보가 대답하지 않았다. 진이 웃었다.

"알겠소. 묻지 않겠소. 삼층 화물칸에 빈 자리가 있소. 쌀 가마니 사이가 가장 따뜻하오."

연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잊지 않겠소."

"은혜는 무슨. 장 선생의 부탁이면 사람이든 코끼리든 보내주지."

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hr>
출항.

봉황호의 기적이 울렸다.

갑판 위에서 연재희가 장윤보를 내려다보았다. 선착장에 서 있는 장윤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고, 미소 짓는 사내.

"윤보!"

연재희가 소리쳤다. 기적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정순과 대한이를…… 부탁하네!"

장윤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주먹을 쥐고.

"만세."

입 모양으로 읽을 수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만세.

연재희도 주먹을 들었다.

"만세."

두 사내의 주먹이 상하이의 하늘 아래서 마주했다.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배가 움직이고 있었다. 장윤보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봉황호가 황푸강을 빠져나갔다.

동중국해.

바람이 세졌다. 파도가 높아졌다.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재희가 뱃머리에 섰다.

앞에 — 태평양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회색빛 하늘과 회색빛 물이 수평선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 수평선 너머에 미주가 있었다. 이천만 달러가 있었다. 조국의 미래가 있었다.

뒤에 — 조선이 있었다.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땅. 그러나 연재희의 등 뒤에서 —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내의 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지들의 맹세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재희가 만년필을 꺼냈다.

바다 바람에 뚜껑이 흔들렸다. 그가 수첩을 펼치고, 첫 줄을 적었다.

삼월 팔일.

맑음. 바람 강함.

조선을 떠났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열두 번 돌아보았다.

연재희가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 앞을 보았다.

태평양.

이십일 간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 정말로.
<hr>
이틀째.

배가 동중국해를 지나고 있었다. 파도가 높았다. 배가 앞뒤로, 좌우로 흔들렸다. 쌀 가마니가 삐걱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연재희의 몸도 함께 굴러갔다.

뱃멀미가 시작되었다.

위장이 뒤집어지는 느낌. 먹은 것이 없는데도 토할 것 같았다. 서광제가 준 약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쌀 가마니 위에 엎드려 이마를 대고 숨을 고르는데, 갑판 위에서 중국인 선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선 양반! 밥 먹어!"

해치를 열고 내려온 것은 진 선주의 아들, 진소명(陳小明)이었다. 열여섯 살의 소년. 얼굴이 검게 탄 바다 소년이었다.

"밥이요?"

연재희가 일어나 앉았다. 소명이 양철 그릇을 내밀었다. 쌀죽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보냈어. 뱃멀미에는 죽이 최고래."

연재희가 죽을 받아들었다. 한 숟가락 떴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위장이 달래지는 느낌이었다.

"고맙구나."

"고마울 것 없어. 우리 배에 타면 다 식구야."

소명이 쌀 가마니 위에 걸터앉았다.

"아저씨, 어디까지 가?"

"샌프란시스코."

"거기 뭐 있어?"

"돈."

"돈?"

"나라를 되찾을 돈."

소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열여섯 살 소년에게 '나라를 되찾는다'는 말은 너무 크고 막연했을 것이다.

"중국도…… 나라가 이상해."

소명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편 때문에 엉망이고, 군벌들이 싸우고, 외국 놈들이 설치고."

"비슷하구나."

"비슷해.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말해. 바다만 건너면 된다고. 바다 건너에 답이 있다고."

연재희가 미소 지었다.

"네 아버지도 미친 사내구나."

"우리 아버지? 완전 미쳤지. 폭풍이 와도 키를 안 놓아. 배가 뒤집어질 것 같아도. 미친 사내."

소명이 히히 웃었다.

"하지만 미치지 않으면 바다를 못 건너. 아저씨도 미쳤지?"

"미쳤지."

"그래서 건너는 거지?"

"그래."

소명이 일어서며 해치를 가리켰다.

"갑판에 올라와. 바다 보면 뱃멀미 나아."

"그래도 되겠느냐? 숨어 있어야 하지 않느냐?"

"이 바다에선 누가 봐? 물고기밖에 없어."

연재희가 소명을 따라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소금기 있는 바람.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렸다.

수평선.

삼백육십 도 어디를 봐도 — 물뿐이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 그 경계 위에 봉황호 한 척이 떠 있었다.

"넓구나."

연재희가 중얼거렸다.

"태평양이 그래. 넓어. 너무 넓어서 가끔 무서워."

소명이 돛대에 기대서며 말했다.

"하지만 건너면 — 다른 세상이야."

연재희가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갑판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수첩을 펼쳤다.

삼월 구일. 셋째 날.

맑음. 바람 강함. 파도 높음.

동중국해를 지나고 있다.
뱃멀미가 심하다. 죽을 얻어먹었다.
진소명이라는 소년을 만났다. 열여섯 살. 바다의 아들.

수평선 위에 아무것도 없다.
조선도, 일본도, 미주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곳에 있다.

물 위의 사내.
나라 없는 사내.
가족 없는 사내.

하지만 주머니에 만년필이 있다.
가슴에 머리카락이 있다.
등에 맹서가 있다.

이것이면 된다.
이것이면 — 태평양을 건널 수 있다.

바람이 수첩 페이지를 넘겼다. 연재희가 수첩을 덮고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글 쓰는 거야?"

소명이 물었다.

"기록하는 것이지."

"뭘?"

"진실을."

소명이 만년필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한자가 써 있어. 뭐라고 써있어?"

"진실(眞實)."

"좋은 글자다."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도 말해. 바다 위에서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바다는 다 알아. 바다한테 거짓말하면 — 삼켜 버려."

연재희가 태평양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다 안다.

그렇다면 — 이 바다 위에서 쓰는 기록은 모두 진실이어야 한다.
<hr>
열흘째.

봉황호가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었다. 사방이 물. 물. 물. 물.

밤하늘에 별이 쏟아졌다.

연재희가 갑판에 누워 별을 보았다. 경성에서 본 별과 같은 별일까. 정순도 지금 이 별을 보고 있을까.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정순의 머리카락. 코에 대보았다. 희미하게 — 동백기름 냄새가 났다. 정순이 늘 머리에 바르던 기름.

"보고 싶소."

바다에 대고 말했다.

"정순아. 보고 싶소."

파도가 대답했다.

철썩. 철썩.

그것이 대답이라면 — 나도 보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hr>
열닷새째.

폭풍이 왔다.

하늘이 검어지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파도가 배 높이를 넘었다. 봉황호가 산처럼 솟았다가 골짜기로 내려꽂혔다. 갑판의 밧줄이 끊어지고, 화물이 굴러다녔다. 선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쌀 가마니가 무너졌다. 연재희의 위로 가마니 세 개가 쏟아졌다.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었다.

'죽는가.'

순간 그 생각이 스쳤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쌀 가마니에 깔려서. 이렇게 허무하게.

'안 된다.'

연재희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가 아직 아버지를 부르지 못했다.'

힘을 쥐어짜 가마니를 밀어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몸을 빼냈다. 갈비뼈가 아팠다. 부러진 것인지 금이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았다.

품을 더듬었다.

만년필. 있다.
비단 주머니. 있다.
맹서 사본. 있다.

세 가지가 모두 있었다.

"살았네."

연재희가 웃었다. 어둠 속에서. 폭풍 속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웃었다.
<hr>
스무날째.

폭풍이 지나갔다.

바다가 잔잔해졌다. 유리처럼 고요한 태평양. 봉황호가 느릿느릿 동쪽으로 나아갔다.

진 선주가 갑판에 올라와 수평선을 가리켰다.

"내일이면 보이네."

"무엇이?"

"미국이지."

연재희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미국.

이천만 달러.

그리고 — 111년의 두 번째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