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1 만세의 날
Ch.1 만세의 날 — Part 8 — 부두의 새벽
Part 8 — 맹세 (1919년 3월 7일, 밤)
장윤보의 미곡상 창고.
밤 열한 시.
쌀가마니 삼백 개 뒤편, 숨겨진 방. 등잔불 다섯 개가 열 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연재희가 앉았다. 맞은편에 백경수. 왼편에 조봉출, 서광제. 오른편에 이상덕, 최운학. 그리고 한일명, 송학주, 윤택선, 장윤보.
열 명.
열 가문의 가장들이, 쌀창고 비밀 방에 모여 있었다.
연재희가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네."
"모였네."
이상덕이 답했다. 팔의 붕대가 피에 젖어 있었다. 수원에서 헌병과 부딪친 상처였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네."
연재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일 새벽, 인천항을 떠난다. 장윤보의 어선 '삼호(三號)'를 타고 상하이로. 그곳에서 화물선 봉황호로 갈아타고 태평양을 건넌다.
"떠나기 전에…… 각자의 역할을 정하겠네."
연재희가 만년필을 꺼냈다. 종이를 펼쳤다. 등잔불이 흔들렸다.
"내가 없는 동안, 이 땅은 어둡겠지만 — 우리 열 가문이 버텨야 하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가 첫 번째 이름을 적었다.
白 — 백경수.
"경수."
"응."
"너는 기록하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게. 헌병의 만행을, 동포의 고통을, 그리고 —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백경수가 카메라를 어루만졌다.
"내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셔터는 누르겠네."
"그리고…… 내 아들."
"대한이?"
"대한이가 크면…… 사진을 보여주게. 아버지가 무엇을 위해 떠났는지, 이 사진들이 말해줄 것이네."
백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맡기게."
趙 — 조봉출.
"봉출."
"여기 있네."
조봉출. 남대문시장의 거상. 포목에서 곡물까지, 시장에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물건은 없었다.
"너는 자금 루트를 만들게."
"자금 루트?"
"내가 미주에서 모은 돈을 조선으로 들여올 통로가 필요하네. 네 무역상 네트워크를 쓰겠네."
조봉출이 코를 문질렀다.
"중국 상인들과 연결하면 되네. 상하이, 칭다오, 대련. 무역 대금으로 위장해서 자금을 보내면 일본 놈들이 추적하기 어렵네."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고말고. 장사치가 돈 굴리는 건 밥 먹는 것보다 쉽네."
조봉출이 씩 웃었다. 시장 상인의 웃음.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자의 웃음.
徐 — 서광제.
"광제."
"응."
"너는 사람을 살리게."
서광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
"부상자가 늘어날 것이네. 탄압은 더 심해질 것이고, 총과 칼 앞에 맨몸으로 서는 사람들이 다칠 것이네. 너는 그들을 치료하게."
"그것이 내 일이네."
"그리고…… 정순을."
연재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정순의 기침이…… 심해지고 있네."
서광제가 눈을 감았다.
"알고 있네. 내가 돌보겠네. 약을 구하겠네. 어떻게든."
"은혜를……"
"은혜 말하지 마라, 재희. 우리가 남이냐."
李 — 이상덕.
"상덕."
"여기 있네."
군인.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나라가 없어진 뒤에도 군인의 자세를 버리지 않은 사내.
"너는 싸우게."
"싸우겠네."
"만주로 가게. 독립군에 합류하게."
이상덕의 눈이 빛났다.
"기다리던 말이네."
"그러나……"
연재희가 이상덕을 똑바로 보았다.
"무모하게 죽지 마라."
"군인은 죽는 것이 일이네."
"아니. 군인은 살아서 이기는 것이 일이네. 죽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네. 살아서 싸우는 것이 진정한 용기네."
이상덕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알겠네. 살아서 싸우겠네."
"약속하게."
"약속하네."
崔 — 최운학.
"운학."
"네."
최운학. 서당 훈장의 아들.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사립학교를 세운 교육자.
"너는 가르치게."
"가르치겠네."
"조선어를 가르치게. 역사를 가르치게. 일본 놈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지우려 할 것이네. 너는 그것을 지키게."
최운학이 주먹을 쥐었다.
"말과 글이 사라지면 민족이 사라지네. 알고 있네."
"야학을 열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낮에는 일본어를 가르치더라도, 밤에는 조선어를 가르치게."
"밤의 교실…… 좋은 이름이네."
최운학이 미소 지었다. 교육자의 미소. 어둠 속에서도 불씨를 지키는 자의 미소.
韓 — 한일명.
"일명."
"여기 있네."
한일명. 궁중 화원(畵員) 출신의 서예가이자 화가. 붓 하나로 산수를 그리고, 글씨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인.
"너는 그리게."
"그리겠네."
"독립선언서를 아름답게 써서 남기게. 태극기를 그리게.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그림을 그리게."
한일명이 품에서 붓을 꺼냈다.
"붓으로 칼을 당할 수는 없지만, 붓으로 마음을 베는 것은 가능하네."
"예술이 무기가 되는 날이네."
"이미 되었네. 정순 낭자가 그린 태극기가 증명했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정순이 그린 태극기가 — 경성을 뒤흔들었다.
宋 — 송학주.
"학주."
"응."
송학주. 활판 인쇄소의 주인. 활자 하나하나를 손으로 주워 맞추는 장인. 글자가 곧 그의 생명이었다.
"너는 찍어내게."
"찍어내겠네."
"전단을, 격문을, 소식지를. 일본 놈들의 눈을 피해서, 밤마다 찍어내게."
송학주가 주머니에서 활자 하나를 꺼냈다. 납으로 된 작은 글자. '독(獨)'.
"이 글자 하나가…… 총보다 강하네."
"맞네."
"재희, 네가 돌아올 때까지 인쇄기를 멈추지 않겠네. 이 활자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尹 — 윤택선.
"택선."
"여기 있네."
윤택선. 경성공업전습소 출신의 기술자. 시계를 고치고, 기계를 만드는 손재주의 사내.
"너는 만들게."
"무엇을?"
"통신 장비를. 무전기를. 암호 장치를.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윤택선의 눈이 반짝였다. 기술자의 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자의 눈.
"시간이 좀 걸리겠네."
"얼마나?"
"반년…… 아니, 석 달이면 시작품을 만들 수 있네."
"부탁하네."
"부탁은 무슨. 기계를 만드는 것이 내 일인 것을."
張 — 장윤보.
마지막.
장윤보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윤보."
"응."
"너는 보내게. 사람을, 물건을, 소식을. 조선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미주로. 이 네트워크가 끊어지지 않게."
장윤보가 미소 지었다.
"보내는 것은 장(張) 가문의 천직이네. 걱정 마라."
"그리고…… 내 가족을."
"알고 있네. 정순과 대한이. 내가 돌보겠네."
"고맙네."
"고마울 것 없다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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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이 원형으로 앉았다.
연재희가 만년필을 들었다. 종이 한 장을 가운데에 놓았다.
"맹세하겠네."
열 명의 눈이 종이 위에 모였다.
연재희가 글을 썼다.
우리 열 가문은 맹세한다.
하나. 진실을 지킨다. 어떤 위협에도 진실을 굽히지 않는다.
둘. 비밀을 지킨다. 이 자리에서 오간 말을 죽어도 발설하지 않는다.
셋. 서로를 지킨다. 한 가문이 쓰러지면 아홉 가문이 일으켜 세운다.
넷. 다음 세대에 전한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의 아들딸이 이어받는다.
다섯. 끝까지 간다. 조국이 광복되는 날까지. 아니, 그 뒤에도.
1919년 3월 7일.
경성.
연재희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서명하겠네."
첫 번째. 연재희. '延'
두 번째. 백경수. '白'
세 번째. 조봉출. '趙'
네 번째. 서광제. '徐'
다섯 번째. 이상덕. '李'
여섯 번째. 최운학. '崔'
일곱 번째. 한일명. '韓'
여덟 번째. 송학주. '宋'
아홉 번째. 윤택선. '尹'
열 번째. 장윤보. '張'
열 개의 성이 한 장의 종이 위에 새겨졌다.
연재희가 종이를 들어올렸다. 등잔불에 비추었다. 열 개의 먹 글씨가 빛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우리의 시작이네."
"시작이네."
열 명이 동시에 말했다.
쌀창고의 비밀 방. 등잔불 다섯 개. 열 명의 사내. 한 장의 맹서.
이것이 — 111년의 맹세였다.
아직은 아무도 몰랐다. 이 맹세가 5대에 걸쳐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 열 가문의 후손들이 2030년 한반도 통일의 날까지 서로를 지킬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만년필은 알았다.
연재희의 품속에서, '眞實' 두 글자가 또 한 번 — 금빛으로 빛났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다만, 등잔불이 한 번 — 밝아졌다가 — 다시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