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1 만세의 날
Ch.1 만세의 날 — Part 6 — 만년필의 비밀
Part 6 — 루트 (1919년 3월 6일)
삼월 육일. 새벽.
장윤보의 미곡상 창고.
쌀가마니 삼백 개가 쌓인 창고 뒤편에 비밀 공간이 있었다. 가마니 벽을 밀면 좁은 방이 나왔다. 장윤보가 밀수에 쓰던 방이었다. 지금은 독립운동의 작전실이 되어 있었다.
장윤보가 지도를 펼쳤다.
태평양. 경성에서 호놀룰루까지, 바다 위에 긴 선이 그어져 있었다.
"루트를 세 가지 짰네."
장윤보가 연필로 지도를 짚었다.
"첫째, 인천에서 상하이. 상하이에서 호놀룰루. 가장 안전하지만 가장 느리네. 한 달."
"둘째는?"
"부산에서 나가사키, 나가사키에서 요코하마, 요코하마에서 호놀룰루. 일본 땅을 밟아야 하네. 위험하지만 정기 항로가 있어 빠르네. 이십일."
"일본 땅은 밟고 싶지 않네."
"알겠네. 셋째."
장윤보의 연필이 인천에서 곧장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밀항이네."
"밀항?"
"내 거래선 중에 중국인 화물선주가 있네. 진(陳)이라는 사내야. 상하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비단과 차를 실어 나르는 삼천 톤급 화물선 '봉황호(鳳凰號)'를 운영하네."
"화물선에?"
"쌀 가마니 사이에 숨어서 가는 것이지. 상하이까지는 내 어선으로 보내겠네. 상하이에서 봉황호로 갈아타면, 샌프란시스코까지 스물하루."
연재희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인천에서 상하이, 상하이에서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 직선으로 그으면 단순해 보이지만, 그 선 위에는 폭풍과 파도와 일본 해군의 감시가 놓여 있었다.
"비용은?"
"배삯은 내가 해결하겠네. 진과는 십 년 거래야. 의리가 있는 사내지."
"고맙네, 윤보."
"고마울 것 없네. 내가 하는 일은 물건을 보내는 것이네. 사람이든 물건이든, 보내야 할 곳에 보내는 것이 장(張) 가문의 일이네."
장윤보가 웃었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았다.
"다만……"
"다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가 문제네. 미주 동포 사회를 알아야 하네. 누가 돈이 있고, 누가 뜻이 있는지. 그것을 모르면 이천만 달러는 꿈이네."
"방법이 있나?"
장윤보가 서류 봉투를 건넸다. 안에 편지 세 통이 들어 있었다.
"첫째, 안창호 선생에게 보내는 소개장. 흥사단 인맥을 열어줄 것이네."
"둘째?"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교민회장 박용만에게 보내는 서신. 농장 한인 노동자 칠천 명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네."
"셋째?"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목사 황사용에게 보내는 부탁장. 미주 한인 교회 네트워크가 가장 넓은 사람이지."
연재희가 편지 세 통을 받아들었다.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이 세 통의 편지가 열어줄 문은 — 태평양만큼 넓었다.
"윤보."
"응."
"이천만 달러…… 정말 가능하다고 보나?"
장윤보가 주판을 꺼냈다. 미곡상 장윤보의 주판. 쌀 한 가마니부터 독립운동 자금까지, 이 주판 위에서 계산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딸깍. 딸깍. 주판알이 움직였다.
"미주 한인 약 팔천 명. 하와이 칠천, 본토 천 명."
"적네."
"적지만, 이들이 번 돈이 적은 것은 아니네.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한 명의 월급이 십오 달러. 연간 백팔십 달러. 칠천 명이면 연간 백이십육만 달러."
"그것으로는……"
"듣게. 거기서 끝이 아니네."
장윤보의 주판이 다시 움직였다.
"미주 한인 중 사업가가 있네. 김종림이라는 사내가 쌀농사로 큰돈을 벌었네. 백만 에이커 규모야. 그리고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의 한인 지주 세 명, 캘리포니아 포도원의 한인 오너 두 명. 이들의 자산을 합하면……"
딸깍.
"삼백만 달러는 되네."
"아직 천칠백만이 부족하네."
"부족하지. 하지만."
장윤보가 주판을 내려놓고 연재희를 똑바로 보았다.
"이천만 달러는 한 번에 모으는 돈이 아니네. 십 년, 이십 년, 어쩌면 오십 년에 걸쳐 모으는 돈이네."
"오십 년?"
"그래. 하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모을 수 없네."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작하겠네."
"이천만 달러. 이것은 숫자가 아니네, 재희."
"알고 있네."
"이것은 약속이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 하는 약속. 언젠가 이 돈이 조국에 돌아간다는 약속."
연재희가 만년필을 꺼냈다. 종이 위에 적었다.
이천만 달러(二千萬弗).
이것을 조국에 돌려보낸다.
필요한 날이 올 때까지, 지킨다.
"이것이 첫 번째 기록이네."
장윤보가 그 글씨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제…… 정순에게 말해야 하네."
연재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알고 있네."
<hr>
오후.
장윤보의 창고에서 나온 연재희는 서광제를 만났다.
"정순의 상태가 어떻소?"
서광제가 진맥을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출산 후 회복이 느리네. 피가 많이 부족하고, 기력이…… 솔직히 말하면, 여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네."
"데려갈 수 없다는 뜻인가?"
"절대 안 되네. 지금 몸으로 배를 타면, 살아서 도착할 수 없네."
연재희의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아내를 두고 가야 한다.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
"얼마나 걸리겠소? 회복이?"
"빨라야 석 달. 제대로 쉬고 잘 먹는다는 전제 하에."
"석 달……"
"그리고 솔직히…… 정순의 가슴 소리가 좋지 않네."
연재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가슴?"
"기침이 있네. 아직 심하지는 않지만……"
서광제가 말을 흐렸다. 의사는 진단명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재희는 알았다. 폐결핵. 조선인의 절반이 앓고 있는 병. 특히 산후에 잘 발병하는 병.
"약은?"
"스트렙토마이신이라는 것이 서양에서 개발 중이라는 소문은 있으나…… 아직 조선에는 없네."
"없다고?"
"없네."
연재희가 벽을 짚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내가 아프다.
약이 없다.
그리고 나는 떠나야 한다.
"광제."
"응."
"정순을…… 부탁하네."
서광제가 연재희의 손을 잡았다. 의사의 손. 수천 명의 맥을 짚어온 손. 그 손이 연재희의 손을 꽉 쥐었다.
"맡기게. 내 목숨을 걸고 돌보겠네."
"은혜를 어찌 갚겠나."
"갚을 것 없네. 이것이 서(徐) 가문의 일이네. 아프면 고치고, 약하면 지키는 것이지."
연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떠나야 했다.
두고 가야 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해도 —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