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Ch.1 만세의 날
Ch.1 만세의 날 — Part 1 — 삼월 초하루
Part 1 — 새벽 (1919년 3월 1일, 오전 5시)
연재희는 새벽 닭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아니, 뜬 것이 아니었다. 밤새 한 번도 감지 못한 눈이었다. 천장의 나무결이 새벽빛에 서서히 드러났다. 쥐 한 마리가 대들보를 타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정순이 몸을 뒤척였다.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음……"
"어디 아프시오?"
"아이가…… 아이가 내려오는 것 같아요."
연재희가 벌떡 일어났다. 아내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월의 새벽, 방 안 기온이 영하에 가까웠는데, 땀이라니.
"산파를 부르리다."
"아직이에요. 아직……"
정순이 이를 악물었다. 양수가 터진 것은 아니었지만, 배가 주기적으로 조여들고 있었다. 예정일이 사흘 뒤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안 돼요."
"무엇이."
"오늘 가시면 안 돼요. 내가…… 내가 이러는데."
연재희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진통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혹은 그 둘 다인지.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연 서방!"
낮은 목소리였다. 연재희가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백경수. 사진관을 운영하는 친구. 오늘 탑골공원에 같이 가기로 한 사내.
"준비되었는가?"
백경수의 품 안에서 무언가가 불룩했다. 카메라였다. 독일제 폴딩 카메라. 경성 전체에 세 대밖에 없다는 귀한 물건이었다. 오늘, 이것으로 역사를 찍을 작정이었다.
"아내가……"
"알고 있네. 산기가 있다며?"
"자네가 어떻게?"
"밤에 조 어른이 전해주었네. 산파를 이미 불러놓았어."
연재희가 백경수를 바라보았다. 서른한 살, 경수의 눈에는 걱정과 결의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자네는 가야 하네, 재희."
"아내를 두고?"
"태극기 서른일곱 장이 광에 있잖나. 그걸 누가 나르지? 자네가 안 가면 종로 쪽 배포가 전부 무너지네."
연재희가 눈을 감았다.
나라와 아내.
이것이 선택이란 말인가. 스물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이토록 잔인한 선택은 처음이었다.
"재희."
백경수가 한 발짝 다가섰다.
"내 아우 경호가 이 집에 올 것이네. 산파와 함께. 정순 아씨는 내가 책임지겠네."
"……"
"자네는 탑골공원으로 가게. 정오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네. 그 자리에 자네가 없으면 안 되네."
방 안에서 정순의 신음이 다시 들렸다.
연재희가 광으로 갔다. 짚더미 아래에 숨겨둔 보자기를 꺼냈다. 태극기 서른일곱 장. 한 장 한 장 손으로 그린 것이었다. 정순이 밤마다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하듯 그렸다. 만삭의 배를 안고, 붓을 들고, 태극의 빨강과 파랑을 한 땀 한 땀.
"이것을……"
보자기를 펼치자, 태극기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검은 만년필 한 자루.
연재희가 멈칫했다.
이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어제까지 이 자리에 없었다. 누가, 언제 놓아둔 것인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었다. 그런데 — 이상했다. 손에 닿는 순간, 차가움이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미지근했다.
"이게 뭔가?"
백경수가 다가와 보았다.
"만년필이로군. 어디서 났나?"
"모르겠네."
연재희가 만년필을 빛에 비추어보았다. 검은 몸체에 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眞 實
진실.
두 글자가 새벽빛에 번뜩였다.
"가져가게."
백경수가 말했다.
"왜?"
"나도 모르겠네. 그냥…… 가져가야 할 것 같네."
연재희가 만년필을 품에 넣었다. 가슴 가까이. 심장 바로 위에. 이상한 일이었다 — 만년필이 닿은 곳에서 온기가 번져갔다. 이 추운 새벽에.
방으로 돌아왔다.
정순이 이불 위에 누워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진통의 간격이 좁아지고 있었다.
"여보."
"……"
"나는 가야 하오."
정순이 눈을 떴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보았다. 오래, 깊이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알아요."
"미안하오."
"미안하지 마세요."
정순이 남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힘찬 발길질이었다.
"이 아이도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어디 가는지."
"……"
"만세를 부르고 오세요. 크게. 이 아이가 들을 수 있게."
연재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보이지 않는 새벽이어서 다행이었다. 양반의 사내가 아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양반이고 뭐고 상관없었다.
"반드시 돌아오리다."
"약속이에요."
"약속이오."
연재희가 일어섰다. 보자기를 등에 졌다. 태극기 서른일곱 장의 무게. 그리 무겁지 않았다. 종이와 천의 무게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 —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무게 — 는 산보다 무거웠다.
문을 나섰다.
백경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품에 안은 채.
"가세."
두 사내가 골목으로 걸어갔다. 새벽빛이 하늘 끝에서 스며들고 있었다. 동쪽이 붉었다. 오늘은 유난히 붉었다.
뒤에서 정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만세."
연재희가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문지방에 기댄 아내가 보였다. 만삭의 몸으로, 새벽바람을 맞으며, 한 손으로 배를 감싸고 — 웃고 있었다.
"만세를 부르세요. 크게요."
연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백경수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자네 아내…… 대단한 여인이야."
"알고 있네."
"아이가 오늘 나오면 이름은 정했나?"
연재희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대한."
"대한?"
"대한이라 지을 것이네."
백경수가 웃었다.
"대한. 연대한. 좋은 이름이군."
"만세 소리를 들으며 태어날 아이니까."
두 사내가 종로 방향으로 걸어갔다. 새벽의 경성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서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골목에서, 한옥 지붕 아래에서, 시장 뒷골목에서. 품 안에 태극기를 숨긴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탑골공원을 향해.
정오를 향해.
만세를 향해.